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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저술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6-812-A00002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11월 01일 ~ 2007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채미하
연구수행기관 경희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전근대 유교문화권의 여러 국가에서 제사는 중요한 국가행사의 하나였다. “국가의 大事가 제사와 군사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나, “무릇 治人의 道는 禮보다 급한 것이 없고, 예에는 五禮가 있으되 제사보다 중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洪範〉에서는 祀, 곧 제사를 食․貨와 더불어 八政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제사가 정치의 요건으로 제시되기도 하였음을 말해 준다. 가령 殷에서는 여러 씨족을 통솔할 때의 기본적 질서는 은왕실의 조상제사를 매개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북방 흉노족의 제의 과정은 정치적 의논과 결정, 그리고 1年간의 경제 형편과 인적상황을 점검하는 등의 기능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국 고대에서도 국가제사가 중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연구도 폭넓고 깊이 있게 이루어져 왔다. 특히 신라의 각종 제사, 그 가운데에서도 시조묘제사, 신궁제사, 오묘제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는 이것들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제사들이 신라의 국가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새로운 王이 즉위하면 시조묘 혹은 신궁에서 제사하면서 즉위를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묘제사는 국왕의 직계조상에 대한 제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에서 정치사적 관점에서 신라 종묘제의 실체와 그 변동을 연구하려고 한다. 신라 종묘제의 변화양상을 추적하는 한편 그것을 왕권의 추이와 관련하여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의 국가 혹은 왕실제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라 정치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첫째 신라의 국가제사 또는 왕실제사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삼국사기》제사지 신라조(이하 제사지 신라조라고 함)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제삭지 신라조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근대 유교문화권 사회에서 국가를 종묘․사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종묘제사가 갖는 정치적 의의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국왕과 왕실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종묘제사는 정치적 변동과 밀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왕의 연구에서는 종묘제사와 관련해서 정치사적 고찰이 거시적으로는 이루어졌으나, 미시적인 면이 간과된 측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신라 종묘제를 미시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실 파악에도 문제가 있다. 가령 신궁의 시조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오묘제의 시행 시기에도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신문왕 7년 4월 기사를 중시하여 신문왕 7년 무렵에 오묘제가 始定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신문왕 7년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무열왕대 오묘제가 始定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오묘제가 개정 되기 전까지 오묘의 首位에 모셔진 태조대왕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본서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사실 파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연구자들의 관심이 크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우선 시조묘제사의 시조가 혁거세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3성집단의 연맹을 토대로 전개된 신라 상고기 내내 혁거세왕이 시조묘의 시조로 모셔질 수 있었던 정치적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였다. 그리고 신궁 제사는 신라말까지 중요한 국가제사의 하나였음에는 분명하나 오묘제가 수용, 始定, 개정되면서 신궁제사는 변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신문왕 7년 4월 기사를 오묘제의 始定이라는 측면에서는 주목하여 왔으나, 이 제사가 당시에 가지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였다. 그리고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중대 무열왕계 왕권은 무너졌다. 그런데 혜공왕대에 오묘제가 개정된다. 개정된 오묘제는 하대에 오묘제가 다시 改定될 때까지 그 원칙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하다면 改定된 오묘제를 둘러싼 왕실 세력과 진골귀족 세력간의 갈등 및 타협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대 오묘제의 개정과 관련해서는 특히 그러하였다. 혜공왕대 개정된 오묘제는 애장왕대 다시 개정된다. 이를 更定 五廟制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으나, 五廟制 更定의 배경이라든가, 그것을 주도한 인물,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 등에 대한 이해가 소략하였다. 그리고 오묘제가 更定되면서 하대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원성대왕의 신위는 오묘에 모셔질 수 있었다. 이것이 신라 하대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였다. 경문왕대의 오묘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오묘제의 시정과 개정, 更定의 정치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1 장에서는 제사지 신라조의 구성을 살펴볼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제사지 신라조의 작성에 전거가 된 자료에 대한 설명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제사지 신라조를 서와 본문으로 나누어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제사지 신라조의 작성에 저본이 된 자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제 2 장에서는 시조묘 제사와 신궁 제사를 검토하였다. 우선 시조묘의 시조와 그 성격을 알아보고, 상고기를 니사금 시기와 마립간 시기로 나누어서 시조묘 제사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신궁에 모셔진 시조와 그것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소지․지증왕과 신궁제사, 진평왕과 신궁제사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제 3 장에서는 오묘제의 始定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묘제는 시조묘나 신궁과는 달리 중국의 제사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우선 오묘제에 대한 관심을 김춘추와 관련지어 검토하였다. 그리고 문무왕대 오묘제가 受容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다음으로 신문왕대 오묘제의 始定과 신문왕 7년 오묘제사의 정치적 의미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혜공왕대 개정된 오묘제를 검토하였다.
    제 4 장에서는 신라 하대의 오묘제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인데, 우선 선덕왕대와 원성왕대의 오묘제를 개정된 오묘제와 비교․검토하였다. 더불어 선덕왕대 사직단의 설치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애장왕대 更定된 오묘제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경문왕대의 오묘제를 검토하였다.
  • 한글키워드
  • 시조묘,왕권,오묘,제사지,신라,삼국사기,신궁,종묘제
  • 영문키워드
  • Jesaji(祭祀志 the book of rite) ,Singung(神宮 the divine palace),Samguksaki《三國史記》(national rites in Shilla or royal rites),Omyo(五廟 five ancestor's shrines),Sijomyo(始祖廟 shrine for the founder of a dynasty),Shilla Dynasty,The rite of the ancestral shrine(宗廟制). Rroyal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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