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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균형 외교정책과 2차 대전과의 상관관계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기초연구지원인문사회(창의주제연구)
연구과제번호 2006-321-B00688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01월 01일 ~ 2007년 12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용덕
연구수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유럽의 심장은 어디일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정학적인 면에서는 폴란드이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인 노만 데이비스(Norman Davies)가 1982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신들의 놀이터, 폴란드 역사)』 - 외국어로 쓴 폴란드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 서문에서 폴란드를 유럽의 심장이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폴란드는 동쪽으로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남쪽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 서쪽으로 독일을 비롯한 7개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폴란드는 동유럽의 관문이자 서유럽의 보루라는 지정학적 운명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분단 그리고 민족 말살 등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 근자에 동북아 균형자론이 제기되면서 느닷없이 “과거의 폴란드”를 한국과 비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때 유럽의 강자이던 폴란드는 18세기에 들어와 내부 혼란 끝에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주변 3대 강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3번에 걸쳐 국토가 분할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마지막 3차 분할이 행해진 1795년부터 장장 123년간에 걸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뒤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퀴리 부인, 쇼팽, 『쿠오바디스』의 작가 헨?? 시엔키에비츠 등이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 1차 대전이 끝나는 1918년에 폴란드는 마침내 독립을 되찾는다. 하지만 폴란드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국가 존립을 위협하던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자신의 세계 정복 야심의 희생물로 삼으려 시도한다.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대상으로서 이웃하는 폴란드를 노려보며 호시탐탐 기회만 찾아오길 기다린다. 지정학적으로 서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러시아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 끼어 늘 근심하던 폴란드는 또 다시 민족과 국가의 존속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정치 지도층이 선택한 정책이 바로 균형 정책 즉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등거리 외교 노선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발발을 불과 7년 앞두고 시도된 폴란드의 균형 정책은 주지하다시피 1939년 독일이 폴란드 서부 국경을 침범하면서 철저한 패배로 끝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원하던 폴란드를 서로 간에 나누어 갖게 된다.
    20세기 초 폴란드가 경험한 비운의 역사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 나라의 국방력과 외교력 그리고 동맹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고심하게 만든다. 세계사에는 독일처럼 한때는 패전국이었지만 국력을 신장하고 주변국의 신뢰를 얻어 재통일되는 해피엔딩도 있지만 폴란드처럼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 정세를 주도하려다가 동맹국들로부터 배신당하고 고립되는 비극적 결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 핵 위기와 일본, 중국 등 주변국의 정세가 불안할수록 외교 안보의 기조와 비전을 제시하는 과정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주한 미군의 변화, 한-미-일 공조 체제의 불협화음, 민족주의 발현, 동북아 균형자 등의 주요 변수들을 철저히 검토한 이후에 정책을 수립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0여 년 이상에 걸친 전쟁과 분단 그리고 사회주의 종속을 넘어 진정한 자주 독립국으로 위상을 갖춘 현재의 폴란드가 주변 유럽 국가를 뒤로하고 대서양을 넘은 대미 외교에 명운을 걸고 있는 것은 왜일까? 우리와 여러 면에서 역사가 비슷한 폴란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바로 이점에서 본 과제가 연구될 목적과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 과제인 양차 대전 사이 폴란드의 균형 정책에 대한 국내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를 전후로 하는 1980년대부터 국내 일부 학계에서 동 지역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연구 성과는 동유럽 또는 폴란드의 전반적 지식 소개에 그치고 있으며 본 연구 과제인 폴란드 균형 정책에 관한 전문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기존에 수행된 폴란드와 동유럽에 대한 연구가 동 지역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추구하는 초기 단계의 성과였다면 본 연구자가 수행할 연구 과제인 “폴란드 균형 외교정책과 2차 대전과의 상관관계 연구”는 그동안 축적되어온 연구 방법과 학문적 접근을 토대로 폴란드의 균형 정책과 외교 정책에 대한 공시적 연구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기회라 할 수 있다. 본 연구 과제의 진행과 연구 성과물의 성공적 산출은 이후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지역학 연구에 대한 기반 조성에 큰 디딤돌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연구요약
  • 과거 폴란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그리고 상당수 러시아 지역까지 소유하던 유럽의 강국이었다. 16세기 폴란드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이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폴란드는 내우외환 끝에 주변 3대 강국 -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세 번에 걸친 삼국 분할 통치를 겪으며 123년간 나라 없는 설움을 겪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비로소 다시 국가를 재건했다. 전쟁 영웅인 피우수드스키(J. Piłsudski) 장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폴란드는 옛 영토와 명예를 되찾고 이웃하는 양대 강국인 독일과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당시 폴란드 외교 안보는 베르사유 평화조약, 국제연맹, 프랑스-폴란드 동맹의 세 축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한 후 자신의 세계 정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상황이 급변해져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폴란드는 이웃하는 양대 강국인 독일과 소련 중 한 나라와 지나치게 밀착될 경우 다른 한 나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보복이나 공격을 두려워했다. 18세기 국가 분할과 패망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1932년에 스탈린 통치하의 소련과, 1934년에는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과 각각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세력 균형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자국의 군사력과 동맹 관계를 과신하던 당시 폴란드 외무부 장관 ??(J. Beck)은 “굴욕적인 평화보다 폴란드 민족의 자존심이 훨씬 고귀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해 당시 국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폴란드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밀리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전쟁 발발 직전에 체결하며, 상호간에 걸친 폴란드 침략을 용인하고 또 다시 폴란드를 양국 간에 분할한 뒤 소멸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결국 1939년 9월 1일, 180만 명의 독일군이 “폴란드 내 독일인이 학대받고 있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그 막을 올렸다. 그로부터 16일 뒤에는 소련이 “자국민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 어떤 선전포고도 없이 등 뒤로부터 폴란드를 침략했다. 폴란드가 꿈꾸고 확신하던 균형 정책은 채 7년을 넘기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와 상호 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이 즉시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국제 정치에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역학 관계의 전형적인 예로 남아 있다. 이후 폴란드는 동서로 분단되어 각각 독일과 소련이 분할 점령했으며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처참한 대학살과 민족 말살 정책을 감내해야만했다.
    폴란드는 6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60만 명의 군인을 잃었다. 또한 전 인구의 1/6인 6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사망하고 10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이외에 국가 자산 중 38%가 소실됐으며 수도 바르샤바는 히틀러의 특별 명령으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게다가 150만 명의 폴란드인이 전후 공산주의화 정책에 따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돼 노예와 같은 생활을 겪은 뒤 생을 마쳐야했다.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지 못한 폴란드 지도부의 세력 균형이라는 꿈이 폴란드 국민과 전 세계에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 한글키워드
  • 폴란드 균형 외교정책 2차 대전
  • 영문키워드
  • Poland Interrelation Polish Mediation Foreign Policy Second World War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과거 폴란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그리고 상당수 러시아 지역까지 소유하던 유럽의 강국이었다. 16세기 폴란드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이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폴란드는 내우외환 끝에 주변 3대 강국 -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세 번에 걸친 삼국 분할 통치를 겪으며 123년간 나라 없는 설움을 겪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비로소 다시 국가를 재건했다. 전쟁 영웅인 피우수드스키(J. Piłsudski) 장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폴란드는 옛 영토와 명예를 되찾고 이웃하는 양대 강국인 독일과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당시 폴란드 외교 안보는 베르사유 평화조약, 국제연맹, 프랑스-폴란드 동맹의 세 축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한 후 자신의 세계 정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상황이 급변해져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폴란드는 이웃하는 양대 강국인 독일과 소련 중 한 나라와 지나치게 밀착될 경우 다른 한 나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보복이나 공격을 두려워했다. 18세기 국가 분할과 패망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1932년에 스탈린 통치하의 소련과, 1934년에는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과 각각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세력 균형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자국의 군사력과 동맹 관계를 과신하던 당시 폴란드 외무부 장관 ??(J. Beck)은 "굴욕적인 평화보다 폴란드 민족의 자존심이 훨씬 고귀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해 당시 국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폴란드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밀리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전쟁 발발 직전에 체결하며, 상호간에 걸친 폴란드 침략을 용인하고 또 다시 폴란드를 양국 간에 분할한 뒤 소멸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결국 1939년 9월 1일, 180만 명의 독일군이 "폴란드 내 독일인이 학대받고 있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그 막을 올렸다. 그로부터 16일 뒤에는 소련이 "자국민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 어떤 선전포고도 없이 등 뒤로부터 폴란드를 침략했다. 폴란드가 꿈꾸고 확신하던 균형 정책은 채 7년을 넘기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와 상호 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이 즉시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국제 정치에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역학 관계의 전형적인 예로 남아 있다. 이후 폴란드는 동서로 분단되어 각각 독일과 소련이 분할 점령했으며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처참한 대학살과 민족 말살 정책을 감내해야만했다.
    폴란드는 6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60만 명의 군인을 잃었다. 또한 전 인구의 1/6인 6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사망하고 10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이외에 국가 자산 중 38%가 소실됐으며 수도 바르샤바는 히틀러의 특별 명령으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게다가 150만 명의 폴란드인이 전후 공산주의화 정책에 따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돼 노예와 같은 생활을 겪은 뒤 생을 마쳐야했다.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지 못한 폴란드 지도부의 세력 균형이라는 꿈이 폴란드 국민과 전 세계에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 영문
  • A Research on the Interrelation between Polish Mediation Foreign Policy and Second World Wa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유럽의 심장은 어디일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정학적인 면에서는 폴란드이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인 노만 데이비스(Norman Davies)가 1982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신들의 놀이터, 폴란드 역사)』 - 외국어로 쓴 폴란드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 서문에서 폴란드를 유럽의 심장이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폴란드는 동쪽으로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남쪽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 서쪽으로 독일을 비롯한 7개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폴란드는 동유럽의 관문이자 서유럽의 보루라는 지정학적 운명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분단 그리고 민족 말살 등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 근자에 동북아 균형자론이 제기되면서 느닷없이 "과거의 폴란드"를 한국과 비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때 유럽의 강자이던 폴란드는 18세기에 들어와 내부 혼란 끝에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주변 3대 강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3번에 걸쳐 국토가 분할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마지막 3차 분할이 행해진 1795년부터 장장 123년간에 걸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뒤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퀴리 부인, 쇼팽, 『쿠오바디스』의 작가 헨?? 시엔키에비츠 등이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 1차 대전이 끝나는 1918년에 폴란드는 마침내 독립을 되찾는다. 하지만 폴란드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국가 존립을 위협하던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자신의 세계 정복 야심의 희생물로 삼으려 시도한다.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대상으로서 이웃하는 폴란드를 노려보며 호시탐탐 기회만 찾아오길 기다린다. 지정학적으로 서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러시아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 끼어 늘 근심하던 폴란드는 또 다시 민족과 국가의 존속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정치 지도층이 선택한 정책이 바로 균형 정책 즉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등거리 외교 노선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발발을 불과 7년 앞두고 시도된 폴란드의 균형 정책은 주지하다시피 1939년 독일이 폴란드 서부 국경을 침범하면서 철저한 패배로 끝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원하던 폴란드를 서로 간에 나누어 갖게 된다.
    20세기 초 폴란드가 경험한 비운의 역사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 나라의 국방력과 외교력 그리고 동맹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고심하게 만든다. 세계사에는 독일처럼 한때는 패전국이었지만 국력을 신장하고 주변국의 신뢰를 얻어 재통일되는 해피엔딩도 있지만 폴란드처럼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 정세를 주도하려다가 동맹국들로부터 배신당하고 고립되는 비극적 결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 핵 위기와 일본, 중국 등 주변국의 정세가 불안할수록 외교 안보의 기조와 비전을 제시하는 과정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주한 미군의 변화, 한-미-일 공조 체제의 불협화음, 민족주의 발현, 동북아 균형자 등의 주요 변수들을 철저히 검토한 이후에 정책을 수립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0여 년 이상에 걸친 전쟁과 분단 그리고 사회주의 종속을 넘어 진정한 자주 독립국으로 위상을 갖춘 현재의 폴란드가 주변 유럽 국가를 뒤로하고 대서양을 넘은 대미 외교에 명운을 걸고 있는 것은 왜일까 우리와 여러 면에서 역사가 비슷한 폴란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바로 이점에서 본 과제가 연구될 목적과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 과제는 폴란드의 균형 외교 정책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는바 향후 동 분야의 국내 연구자에게 폴란드 외교 정책과 관련된 분석틀과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수 있다. 연구 결과물의 전문 학술지 게재를 통해 동 분야의 연구 주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세밀한 분석은 물론이고 이 분야에 대한 국내외 연구 현황, 연구자 및 연구 기관 단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과제 수행 중 수집한 자료를 ‘공공재(public good)’의 일부로 인식하여 연구 생산물의 기초로 삼을 뿐만 아니라 소속 기관의 소장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소속 기관이 국내 폴란드 지역학 및 외교 분야에 귀중한 주춧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 과제 진행은 자연스럽게 연구자의 학술 대회 발표는 물론 전문 학술지에 게재될 논문 발표 등을 수반하기 때문에 해당 연구 분야에 대한 학문적 관심 및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국과 폴란드는 그 역사적 유사성으로 인해 우리가 배울 점이 많으나 현재로서는 연구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본 연구 과제의 성공적인 수행은 이와 같은 상황 및 인식 개선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본 연구자의 풍부한 해외 생활 경험(10년 거주)과 이를 통해 구축된 해외 네트워크로 본 연구 과제에 관심 있는 국내외 연구자와의 긴밀한 연 계를 통해 국내 연구자의 능력과 실력 그리고 연구 성과를 해외에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 결과물의 교육적 효과는 대학 및 대학원 활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선 본 연구자가 소속되거나 출강하는 대학원 교과 과정에 폴란드 외교와 관련된 세분화된 교과목을 개설하여 석,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보다 폭넓고 심도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학부생을 위해서는 학부 과정 내 전공 및 교양 과목을 개설하여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폴란드 외교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고 동 분야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주력할 예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 과제의 결과물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지역학 및 외교 분야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지침서 또는 교재로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정부 당국 내에 폴란드 및 동유럽 외교 문제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본 연구 결과물은 외교통상부, 국방부, 통일원, 국정원 등 정부 기관의 관련 담당자 및 산하 공공 교육 기관 등에서 지대한 관심을 가질수 있는바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외교 연구 및 교육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본 연구 과제는 폴란드 외교 분야에 대한 풍부한 국외 연구 현황 소개도 포함하고 있다. 본 연구 과제와 관련된 동북아 균형자론이 현재 매우 중차대한 국제적 사안인 점을 감안할 때 정부 당국에서도 한발 물러서서 다른 국가의 경험을 살펴보고 제삼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결과물은 정부 당국 및 관련 부서들에게 우리의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하나의 타산지석을 제공할 수 있다.
  • 색인어
  • 폴란드, 균형 외교정책, 2차 대전, 독일, 러시아, 동유럽, 히틀러, 스탈린, 피우수트스키, 베크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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