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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1930년대 미주에서의 한인사회주의운동의 발생 배경과 초기 특징에 대한 고찰―시카고의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053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고정휴
연구수행기관 포항공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미국 중서부의 중심도시인 시카고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1930년 10월 18일이었다. 여기에서 ‘사회과학’이라 함은, 당시 사회주의적인 이론과 실천을 의미하며, 특히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성공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모범국’인 미국에서, 그 안에서도 또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단체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인물들이 그러한 단체에 참여했으며, 그들이 미국에서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조직 결성과 활동이 미주지역의 한인민족운동 나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편으로 그들은 미국공산당이나 미국 내 소수민족들(예컨대 중국이나 일본, 또는 아프리카 흑인)의 급진단체와는 어떤 연계가 없었을까 하는 점도 궁금해진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왕의 연구로는 현재 단 한편의 논문만이 나와 있다. 재미사학자인 方善柱의「金浩哲과 社會科學硏究會―경제공황기의 美유학생 사회주의운동―」(『在美韓人의 獨立運動』,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논문은 ‘북한노획문서’ 중에 등장한 김호철이라는 한 인물의 발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사회과학연구회에 대한 설명은 주로『신한민보』의 기사들에 의거하여 개괄적인 소개에 그치고 있다.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방선주의 논문이 발표된 후 20년 가까이 후속연구가 나오지 않았던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시각상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식민지시대 국외에서 전개된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어디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충분히 못했던 것이다. 그 단체를 단순히 미주한인사회의 독립운동선상에만 위치지운다면, 설명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와 국내 운동세력들과의 연결, 또 코민테른 및 미국공산당과의 연계 가능성 등을 열어 놓고 검토해 보면 의외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주의운동이 지녔던 ‘국제성’을 새삼 확인할 수도 있다.
    둘째는 자료의 문제이다.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와 관련해서는 현재 구성원들(표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20명 내외)의 신원 파악조차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북미국민회의 기관지나 다름없던『신한민보』에 단편적으로 실리는 기사에 의존하여 설명해 왔다. 그러니까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없이는 더 이상 연구가 진척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떻게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낼 것인가? 이는 문제의식과 시각의 전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와 국내와의 연계 가능성을 열어놓으면, 국내에서의 자료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연구회와 미국공산당과의 연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면, 미국공산당 관계자료들에서 연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문서들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에서 기대하는 효과는 같다. 첫째로 식민지시대 미주지역 한인독립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 줄 수 있다. 이 지역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와서야 활성화 되었지만, 주로 보수적인 인물(이승만·안창호·박용만)과 그들이 이끄는 단체(대한인동지회, 대한인국민회, 대조선독립단) 연구에 치중되어 단조로울 뿐만 아니라 미주한인사회 내의 갈등과 파벌 투쟁이 부각되는 면이 강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라든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와 같은 급진적 성향의 운동단체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 단체는 이념과 인맥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에 닿아 있다. 요컨대 연구회는 미주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연구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둘째는 일제하 한인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서 도외시되었던 한 부분을 메꿀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국내와 시베리아, 만주, 중국관내, 일본 등지에서의 한인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척되어 왔지만, 미주지역 만큼은 공백으로 남겨져 왔다. 여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중심국으로 부상한 미국에 대한 선입견과 미주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들의 보수적 성격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미주한인사회에 대한 선입견 내지 편견은 당시 민족운동세력들에게도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활동의 성패를 떠나 그 존재 자체로서 의미를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계대공황이 전개되던 1930년대 초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출범은 코민테른과 급진적 성향의 한인유학생들 그리고 미국공산당 3자의 야심찬 ‘기획’이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셋째로 본 연구는 일제하 한인유학생사 연구에도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 미국으로의 유학은 조선총독부 당국의 엄중한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숫자는 많아야 700~800명(1910년대에 여권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들 포함) 수준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대체적 성향은 친미적이며 사상적으로도 온건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미주한인사회의 기성단체들과 마찰없이 잘 지냈으며 일부는 대한인국민회라든가 동지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은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출범으로 깨어졌다. 연구회에 참여한 회원들은 미국 자본주의체제와 미주한인사회의 기성단체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 중 일부는 공공연히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로 말미암아 연구회는 미국 정부 및 미주한인사회의 감시와 견제를 받아 1930년대 중반에 해체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미국유학생사에서 이채로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 밝히고자 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1930년 10월 시카고에서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이는 곧 미주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요인을 밝히는 일이다. 검토될 문제는 (1) 세계대공황의 영향, (2) 미주지역 민족운동의 변화와 시카고 한인사회의 상황, (3) 국내와 일본, 중국 등지의 사회과학연구회와의 연결 가능성, (4) 코민테른(Comintern) 및 미국공산당(CPUSA)과의 관계 등이다. (4)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조세핀 플라워(Josephine Flower)의『일본과 중국인 이민 행동주의자들: 미국 내의 조직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1919-1933』(Japanese and Chinese Immigrant Activists: Organizing in American & International Communist Movements, 1919-1933)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둘째는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지녔던 특징과 관련된 문제들로서, (1) 연구회의 목적과 강령, (2) 조직과 구성원, (3) 활동 방향과 내용, (4) 성과 및 의의에 대하여 검토하게 될 것이다. 특히 연구회의 구성원에 대한 분석에서는 각별한 자료 발굴노력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회원은 21명―즉 姜孤舟(또는 강해주), 高炳南, 金高麗, 김봉성(또는 김용성), 金太線, 金浩哲, 남궁인출, 南宮卓, 卞民平, 卞埈鎬, 常漢生, 吳天錫, 이신명, 李承澈, 李應永, 李在白, 李太初(또는 이태호), 趙重哲, 조상연, 한기도, 韓墨鷗(본명 韓世光)―이다. 이들 중 사회과학연구회에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검토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김호철 뿐이다.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사회과학연구회 구성원들의 출신배경과 학력, 경력, 연구회 해체 이후의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가 제대로 진척이 된다면,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계공산주의운동사의 시각에서 보면 동아시아-태평양지역은 하나의 활동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블라디보스톡―상하이-서울―도쿄-샌프란시스코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자들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이 환경과 조건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시카고의 한인사회과학연구회에 대한 연구의 지평은 훨씬 넓어질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미국공산당,세계대공황,사회주의운동,한인사회과학연구회,미국유학생,코민테른,미주한인사회
  • 영문키워드
  • The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CPUSA),Comintern,The Korean Students Club in Chicago for the Study of Socialism,Korean Socialist Movements in America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미국 중서부의 중심도시인 시카고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1930년 10월 18일이었다. 발기인은 강해주(또는 姜孤舟), 高炳南, 金高麗, 金太線, 金浩哲, 卞民平, 李承澈, 李在白, 李太初, 韓墨鷗(본명 韓世光)로 모두 10명이었다. 이들은 창립「취지서」에서 "우리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동무들이 모인 모임이다. 과학과 사상에 남보다 뒤떨어진 우리는 기관이 있어야 할 것을 느끼고 단체적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사상문제를 뜻을 같이하여 연구하기로 맹약하고 이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이어서 "우리는 세계 무산계급의 부르짖음에 보조를 같이하며 약소민족의 설움을 위하여 투쟁전선에 나아갈 것"임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에서 ‘사회과학’이라 함은, 당시 사회주의적인 이론과 실천을 의미하며, 특히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성공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었다.
    본 연구에서 검토한 주요 내용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출현 배경과 관련하여, (1) 세계대공항의 영향, (2)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 변화, (3) 시카고 한인사회의 특징, (4) 국내외 사회과학연구회와의 관련성, (5) 코민테른 및 미국공산당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둘째는 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조직과 구성원이다. 먼저 조직은 ‘위원회’ 형태로서, 집행위원장 산하에 재무·연구·선전 세 개의 부서가 있고 각 부서마다 위원장과 위원들이 배치되었다. 연구회의 참여한 회원들로 현재까지 확인횐 사람은 모두 21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시카고와 그 주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한인유학생들이었다. 특히 연구회의 핵심멤버들―고병남, 김봉성, 김호철, 이응영, 이재백 등―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에 루이스대학(Lewis Institute)에 다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중 고병남은 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출범시키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응영은 제2대 집행위원장으로 연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로서 주목된다.
    셋째는 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주요 활동이다. 연구회는 1930년 10월 18일에 공식 출범한 후 12월 23일에 월례회를 소집하고 세계사조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초빙인사는 장기영, 홍익범, 김창순, 남궁탁이었다. 연구회는 향후 근대사상 문제를 과학적으로 토의하여 일반 사회사상의 보급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후 연구회는 ‘공개강연회’와 ‘시국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미주교민들에게 세계 정세의 변화와 국내외 민족운동의 제반 현안들에 대하여 정보 제공과 더불어 계몽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와 미주한인사회에서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사상을 널리 전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는 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이면조직으로의 발전 모색이다. 연구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미주한인사회 내 보수세력들의 견제와 억압이 심해지자 1935년에 이르러 연구회는 미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산하에 ‘한국인 뷰로(Korean Buro)'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행 여부에 대하여는 앞으로 신중한 검토가 요망된다.
  • 영문
  • The Korean Academy of Social Science, KASS, was formed by a group of Korean students in Chicago, USA on October 18, 1930. Social Science here signifies the theory and practice of socialism at that time and in particular indicates Marxism and Leninism, which led to the Bolshevik Revolution.
    This research addresses four issues. The first concerns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the KASS's advocation of proletarian revolutions in the US-based Korean community, which was known to be conservative.
    The second issue deals with the organization and members of the KASS. Twenty- one have been so far known to have participated in it. It has been confirmed that several core members such as, Ko Pyung Nam, Kim Pong Sung, Kim Ho Chul, Lee Edward Young, and Lee Chai Paik, attended Lewis Institute in the late 1920s and 1930s.
    This report next presents the major activities of the KASS, one of which was to organize 'open lectures' and 'current situation forums,' informing the US-based Koreans of the world situation and the national movement trends of Korea and international society. These activities were aimed at taking the initiative of the national movement of the Korean society in the US and to propagate socialism.
    The last issue concerns the KASS's attempt to change into a secret organization. With the increasing surveillance and pressure of the conservative Korean society in the US, the KASS planned to form the Korean Buro under the central executive committee of the US Communist Party in 1935. A thorough investigation, however, is needed on the actual implementation of this pl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미국 중서부의 중심도시인 시카고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1930년 10월 18일이었다. 발기인은 강해주(또는 姜孤舟), 高炳南, 金高麗, 金太線, 金浩哲, 卞民平, 李承澈, 李在白, 李太初, 韓墨鷗(본명 韓世光)로 모두 10명이었다. 이들은 창립「취지서」에서 “우리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동무들이 모인 모임이다. 과학과 사상에 남보다 뒤떨어진 우리는 기관이 있어야 할 것을 느끼고 단체적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사상문제를 뜻을 같이하여 연구하기로 맹약하고 이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이어서 “우리는 세계 무산계급의 부르짖음에 보조를 같이하며 약소민족의 설움을 위하여 투쟁전선에 나아갈 것”임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에서 ‘사회과학’이라 함은, 당시 사회주의적인 이론과 실천을 의미하며, 특히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성공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모범국’인 미국에서, 그 안에서도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단체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인물들이 그러한 단체에 참여했으며, 그들이 미국에서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조직 결성과 활동이 미주지역의 한인민족운동 나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편으로 그들은 미국공산당이나 미국 내 소수민족들(예컨대 중국이나 일본, 또는 아프리카 흑인)의 급진단체와는 어떤 연계가 없었을까 하는 점도 궁금해진다.
    먼저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의 출범 배경과 관련하여 본 연구에서는 (1) 세계대공항의 영향, (2)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 변화, (3) 시카고 한인사회의 특징, (4) 국내외 사회과학연구회와의 관련성, (5) 코민테른 및 미국공산당과의 관계 등이 검토되었다. 다음으로 사회과학연구회의 구성원에 대한 분석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시카고와 그 주변대학들에 다녔던 한인유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당시 루이스대학의 학적부를 통하여 에 연구회의 핵심멤버들―즉 고병남(Ko Pyung Nam), 김봉성(Kim Pong Sung), 김호철(Kim Ho Chul), 이응영(Lee Edward Young), 이재백(Lee Chai Paik 또는 Lee Paik Chai) 등―이 포진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은 연구회를 발판삼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와 미주한인사회에서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공산주의운동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려고 했다. 그들은 1935년 경 미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산하에 ‘한국인 뷰로(Korean Buro)를 만들려는 계획까지 세웠는데, 그 구체적인 실행 여부에 대하여는 앞으로 신중한 검토가 요망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미국 현지에서의 자료조사 중 <Files of the CPUSA in the Comintern Archives, 1919-1943>에서 의외의 문건을 찾을 수 있었다(여기서 CPUSA라 함은 미국공산당을 가리킨다). 그 문건 중에는 "To The Korean Students, Workers and Honest Intellectuals in U.S.A. For the Eastablishment of the Korean Buro in the Centu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제목의 문서가 들어 있어 한인사회과학연구회와 미국공산당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열게 되었다. 이 문서에 대하여는 앞으로 보다 신중한 검토를 거친 뒤 학계에 보고할 예정이다.
  • 색인어
  •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 시카고 한인사회, 세계대공항, 미국공산당, 한인뷰로(Korean Buro), 고병남, 이응영, 김호철, 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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