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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의 역사와 문화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저술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9-812-A00005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07월 01일 ~ 2012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송호정
연구수행기관 한국교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만주 일대에 존재한 한국 고대의 국가 가운데 700년 이상을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치며 중심 국가로 존속해온 扶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그 동안 부여는 한국 고대사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만주 역사를 주도하였으나 渤海史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邊境의 역사로 취급받아 왔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고조선사와 비교해 주변의 역사로 인식되어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중심에는 부여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부여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연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신채호는 중국 동북지방 일대에서 역사를 주도한 종족과 주민집단을 부여족이라 설정하고 고조선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부여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전술했듯이 부여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그간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한반도 북방에 위치한 초기국가라는 내용으로 다른 초기국가와 함께 간단히 언급된는 정도이다. 최근에야 고고학적 자료의 증가에 따라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나, 그 또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국학자 대부분은 부여사를 고구려사와 마찬가지로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볼 뿐, 결코 한국고대사의 일부로서 부여를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한 고대 국가의 역사를 어떠한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즉 지나친 자기민족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서는 객관적이고도 열린 시각으로 부여사에 대한 연구 역시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고대 이래 우리 민족에게는 범(汎) 부여족 의식이 있다. 이는 부여가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 되었던 나라, 우리 민족의 원류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 부여는 고조선과 함께 우리 역사의 출발이 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고조선 연구에 가려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현재 일반인을 포함해 전문 연구자들조차도 부여가 700여 년 간 만주를 활동 무대로 하면서 한국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최근 길림성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고고학 자료가 조사되고 소개되어 있어 부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부여사와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 기록이 많이 참고된다. 그리고 고고학 방면에서 부여 王城으로 이야기되는 동단산․모아산 유적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들 자료 외에도 길림시와 장춘 일대를 중심으로 노하심 유적, 포자연 유적 등 부여와 관련된 많은 고고학 자료가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한계는 있지만, 현재 단계에서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잘 종합한다면 한국 고대사 속의 부여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동북민족과 강역연구총서>라는 이름의 시리즈 연구서를 내고 있다. 연구서 가운데 黃斌․劉厚生의 양인이 『夫餘國史話』(遠方出版社, 2005)라는 이름으로 부여통사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 서술 자체가 매우 조잡하고 부실하며, 서술 시각 또한 부여사를 중국의 고대 지방 정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학계에서도 이제는 부여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서술을 시도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 동안 부여사 연구의 중요성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자료를 검토해 왔으며, 10여 차례 현지답사와 현지 연구자들을 만나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고찰과 자료를 중심으로 본 저술에서는 부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종합 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되어왔던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 우리 역사인 부여사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주된 목표이다. 그 동안 부여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보다 정리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문헌에 보이는 부여의 성장 과정 및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지역별, 특성별로 고고학 자료를 정리하는 데 기본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三國志』魏書 東夷傳을 중심으로 중국 正史에 기록된 부여 관련 기록을 종합하고, 그 동안 발굴 조사된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면 중국 동북지방 일대에 펼쳐진 고대 부여 역사의 실체를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동안의 중국 보고서들은 지나치게 중화주의 사관에 입각해 모든 고고학 자료를 중국 문화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 내용 또한 대단히 부실한 상황에서 현장에 대한 답사와 박물관 자료 등을 실제 견학하고 여타 문헌 및 연구 성과들을 종합 정리해 본다면 부여 역사 흐름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여사 관련 사진과 그림 및 도면 등을 보완하고 시기별로 자료들을 충실하게 정리하여 책자로 발간한다면 앞으로 남만주 일대에 펼쳐진 고대 역사, 특히 부여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나아가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종합 분석 작업에 많은 진전과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 성과가 그 동안 부여사를 너무 자국사적 입장에서 해석하던 기존 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순수한 학술적 의미에서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부여사는 고조선을 뒤이어 일어난 초기국가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심 과제에서 부여사는 주변사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부여사는 고구려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만주 일대에서 예맥족에 의해 주도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우리 고대 역사임을 많은 분들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이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즉흥적이자 수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한국 고대사의 체계화 작업, 그리고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의 한 과정이다.
    최근에는 동북공정과 관련해 중국에서는 만주 지역은 물론 한반도에서 펼쳐진 고대 역사에 대해 중국사로 해석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부여사에 대한 섣부른 결론 보다는 현지 유적에 대한 답사와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것을 우리 시각에서 종합 정리한 성과물을 내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 문제 및 고대국가 형성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얻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초기 국가의 모습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얻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이후 한국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정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계 국가다. 흔히 부여족이라 일컬어지는 예맥족의 한 종족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西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며 송눈(松嫩)평원 및 송요(松遼)평원을 개척하였고,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동북지방 역사발전의 주체로,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부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강한 통치력,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왕이 존재하여 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며 통치에 임하였고, 큰 종족적 기반을 가진 大加들은 왕이 살던 곳의 사방에 거주하여 연맹체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부여족은 긴 존속 기간 동안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과는 빈번하게 교류하며 우호 관계를 지속한 반면, 북방 유목민족이나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주변의 동옥저나 읍루 등을 복속시킴으로써 만주지역 고대 역사발전의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산업에서도 기후와 토질에 알맞은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비하였고, 말․옥․담비[貂]․구슬[美珠] 등의 특산물을 漢 민족에 수출하고 錦繡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진전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특히 한의 현도군을 비롯하여 고구려․읍루․선비 등 주변 정치세력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부여 왕조의 구체적인 변동상은 잘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오랜 만큼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내부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중심 지역에서도 일련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에 대한 표기가 시기와 사료에 따라 북부여, 부여, 동부여 등으로 표기되는 점에서 입증된다.
    부여는 지리적으로 요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북쪽에 유목민족, 남쪽에 고구려라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漢代 이후 부여는 남방의 성장하는 고구려와 북방유목민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중국과 부단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부여는 서쪽에서 꾸준히 성장한 모용선비 세력과 남방의 고구려의 압력을 받았고, 미처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가야와 마찬가지로 국가 발달이 순조롭지 못하여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전환하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
    대체로 부여는 송눈평원 일대와 그 이북 지역에 위치한 일단의 종족집단이 길림지역에 이주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부여는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으며,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 즉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하였다. 또한 6세기 중반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백제 등 예맥족계 국가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別種’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 가야 지역에서 나오는 귀가 두 개 달린 청동솥 등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계의 유물들을 보건대, 부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나 주민 이동 등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친 영향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그리고 기마민족 일본 정복론을 주창한 에가미 미나오(江上波夫)가 일본 황실의 시조 神武의 東征 전설이 부여 왕 전설을 그대로 옮긴 주몽전설과 같은 내용이라고 역설할 만큼 부여의 개국설화는 고대 동방 제 민족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를 승계한 발해 역시 대조영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그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연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본문 내용은 5개의 소주제, 즉 부여사에 대한 인식의 변천, 부여의 기원과 선주민 문화,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부여의 사회구성, 부여의 풍속과 문화로 설정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동명설화,동부여,부여,포자연문화,서단산문화,대가(大加),사출도(四出道),하호,노하심문화,북부여
  • 영문키워드
  • Paozhiyan Cultyre,North Fuyu,Fuyu,Laoheshen Cultyre,Situansan Cultyre,HaHo(Low house),DaeGa(Big bureaucracy:大加),Sachuldo(四出道),DongMyeong Story,East Fu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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