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계 국가다. 흔히 부여족이라 일컬어지는 예맥족의 한 종족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西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며 송눈(松嫩)평원 및 송요(松遼)평원을 개척하였고, 우리 역사상 고조 ...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계 국가다. 흔히 부여족이라 일컬어지는 예맥족의 한 종족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西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며 송눈(松嫩)평원 및 송요(松遼)평원을 개척하였고,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동북지방 역사발전의 주체로,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부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강한 통치력,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왕이 존재하여 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며 통치에 임하였고, 큰 종족적 기반을 가진 大加들은 왕이 살던 곳의 사방에 거주하여 연맹체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부여족은 긴 존속 기간 동안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과는 빈번하게 교류하며 우호 관계를 지속한 반면, 북방 유목민족이나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주변의 동옥저나 읍루 등을 복속시킴으로써 만주지역 고대 역사발전의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산업에서도 기후와 토질에 알맞은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비하였고, 말․옥․담비[貂]․구슬[美珠] 등의 특산물을 漢 민족에 수출하고 錦繡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진전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특히 한의 현도군을 비롯하여 고구려․읍루․선비 등 주변 정치세력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부여 왕조의 구체적인 변동상은 잘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오랜 만큼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내부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중심 지역에서도 일련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에 대한 표기가 시기와 사료에 따라 북부여, 부여, 동부여 등으로 표기되는 점에서 입증된다.
부여는 지리적으로 요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북쪽에 유목민족, 남쪽에 고구려라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漢代 이후 부여는 남방의 성장하는 고구려와 북방유목민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중국과 부단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부여는 서쪽에서 꾸준히 성장한 모용선비 세력과 남방의 고구려의 압력을 받았고, 미처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가야와 마찬가지로 국가 발달이 순조롭지 못하여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전환하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
대체로 부여는 송눈평원 일대와 그 이북 지역에 위치한 일단의 종족집단이 길림지역에 이주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부여는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으며,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 즉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하였다. 또한 6세기 중반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백제 등 예맥족계 국가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別種’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 가야 지역에서 나오는 귀가 두 개 달린 청동솥 등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계의 유물들을 보건대, 부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나 주민 이동 등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친 영향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그리고 기마민족 일본 정복론을 주창한 에가미 미나오(江上波夫)가 일본 황실의 시조 神武의 東征 전설이 부여 왕 전설을 그대로 옮긴 주몽전설과 같은 내용이라고 역설할 만큼 부여의 개국설화는 고대 동방 제 민족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를 승계한 발해 역시 대조영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그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연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본문 내용은 5개의 소주제, 즉 부여사에 대한 인식의 변천, 부여의 기원과 선주민 문화,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부여의 사회구성, 부여의 풍속과 문화로 설정하여 정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