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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 수서 말갈전을 중심으로 -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시간강사(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1-35C-A00025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박노석
연구수행기관 전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구려 후기 말갈은 고구려와 함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수나 당을 공격할 때에도 같이 참여하였다. 말갈 중 일부는 오히려 수나 당에 귀부하여 오히려 고구려나 주변민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말갈은 고구려 혹은 중국내 국가에 복속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중국정사에 기록된 것은 수서 말갈전이다. 수서의 열전에서 가장 먼저인 열전 46권에는 동이를 다루고 있는데, 고구려(高麗라고 표기)를 가장 먼저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시 당에서 가장 껄끄럽게 여기고 있던 대상이 고구려였음을 의미한다. 실제 󰡔수서󰡕가 완성된 뒤 8년 후인 644년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므로 당 태종은 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취합된 정보는 당의 입장에 맞게, 당에 유리하게 윤색되어져 수서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실 당태종은 자기에게 불리한 기록은 일체 남기지 않은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말갈에 대한 정보는 북제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백약이 수나라 사관이었던 아버지 이덕림의 기록을 참조하였듯이, 수의 기록을 이용하였을 것이지만, 여기에 돌지계(?~정관초)를 통해서 획득한 정보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서 말갈전의 내용은 말갈이 속말부, 백돌부, 백산부, 불열부, 흑수부, 안거골부, 호실부의 7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병력수, 민족적 특징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말갈은 고구려에 인접하고 있었는데, 거주지로 추정되는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만 고구려의 영역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말갈(숙신)을 점령한 기사는 서천왕 1년의 기록밖에는 없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 군사를 파견하여 직신(숙신, 말갈)의 영역을 돌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말갈의 영역을 점령하였고 계속 지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는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점과,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고구려 후기 고구려와 수․당이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말갈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사항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말갈의 영역과 고구려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중복된다. 이것이 말갈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거주하다가 말기에 고구려에서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영역 내에 말갈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던 말갈이 한반도에 있던 말갈과 같이 예맥계말갈인지, 아니면 숙신계 말갈인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또 왜 예맥을 말갈이라 기록하였는지 하는 것이다.
    셋째, 예맥계 말갈이라면 말갈 7부가 모두 예맥계인지 아니면 일부는 숙신계인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일부만이 예맥계라면 말갈 7부 중 어느 것이 예맥계이고, 어느 것이 숙신계인지 하는 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넷째, 전체가 숙신계라면 이들 숙신계 말갈이 어떻게 고구려 영역에 거주하게 된 것인지 하는 점이 밝히고자 한다.
    다섯째, 숙신계 말갈이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여섯째, 고구려에서는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고 있던 이민족인 말갈인들을 어떻게 지배하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려고 한다.
    일곱째, 고구려의 영역 밖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들과 고구려의 관계는 어떠하였으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었을 때 고구려 후기 이민족에 대한 지배 방식과 영역내의 이민족의 지배 방식이 밝혀질 것이다. 또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의문점도 밝혀지리라 생각된다.
  • 기대효과
  •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말갈을 비롯한 주변세력의 동향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에도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우리민족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고민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 복속시켰으며, 점령지 주민 중 일부는 사민을 시켜 고구려 내부에서 살게 하였다. 말갈의 존속 양태를 보았을 때 이러한 고구려의 주민 구성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는 영역을 확장하면서 초기부터 점령지를 성읍 또는 군현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사민된 이민족에 대해서는 자치적인 성격을 띠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세력의 양태를 통해서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현재 우리 민족은 한족(韓族)으로써, 이 한족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예족과 맥족, 한족이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융합되어져 한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섯째, 중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역사속지주의(歷史屬地主義)에 입각하여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속민주의(歷史屬民主義)의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부여는 진․한교체기부터 읍루(숙신, 말갈)를 복속시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중국 삼국시대에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서천왕 11년(280)에 숙신(말갈)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기록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갈지역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말갈족 지배 점령과 지배방식을 󰡔수서󰡕 말갈전을 통해서 간접적이나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기록에 의하여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보고 있으며, 발해의 주민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인이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과연 고구려인이 소수였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도 재고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본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에 대한 연구는 한중일 삼국에서 이루어졌으나, 말갈 7부의 위치문제에 치중된 측면이 많다. 말갈 7부 중 4부는 이전의 숙신지역에 거주하지만, 3부는 고구려의 영역내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의 영역내에 거주하던 3개부의 말갈은 본래 예맥족이었으나 말갈이라고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예맥족과 말갈을 혼용하였는가 하는 점이 설명이 없다. 그리고 수서 말갈전은 속말말갈 출신의 돌지계가 제공한 정보로 작성되었는데 과연 그가 예맥족이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속말말갈인 혹은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 촛점을 두고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를 수서 동이전을 통해서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여섯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서 교육적으로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진작시켜 민족정신을 일깨운다. 둘째,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다. 셋째,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과정에서 말갈의 역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넷째, 고구려의 이민족 지배 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섯째,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은 본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에서는 수서 말갈전과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뿐만 아니라 기존 연구의 한계점에 대해서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고구려,발해,수서 말갈전,말갈 7부,대조영
  • 영문키워드
  • Tae Jo-Young,SuSeo Malgaljeon,Koguryo,Malgal seven tribes,Balha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에 대한 연구는 한중일 삼국에서 이루어졌으나, 말갈 7부의 위치문제에 치중된 측면이 많다. 아울러서 이 지역의 넓은 부분이 고구려의 영역과 중복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말갈이 예맥족을 말갈이라고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예맥족을 말갈이라고 하였는가 하는 점과 돌지계가 예맥족이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여섯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 Sui Shu " based on the contents of the Malgaljeon six century,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Goguryeo and Malgal relationship to examine. Existing done a lot of research about this, but many aspects focused on the location of the problem Malgal 7bu. Along with it, a large part of the region area and duplication of Goguryeo, which mention at this point without. Some Malgal Yemaek record ever had was called Yemaek to Malgal did that it will be revealed.
    In this study, the following effects can be obtained.
    First, " Sui Shu " Malgaljeon for research end of the sixth century,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Goguryeo and Shi Tang 's relationship with Malgal relationship, clearly gives. Called to Malgal in terms of many curious points Daejoyoung on residents about the configuration of the Balhai several aspects of the founders of the Balhai review gives. Third, Goguryeo 's residents configuration which can be easily
    Goguryeo 's local governance, should be able to understand. Fifth, the current open clues about the formation of our nation. Sixth through the configuration of the inhabitants of Goguryeo, Northeast China 's history from the standpoint of democratic processes can refute Seventh Goguryeo Malgal occupied and ruled on these will be able to see. Eighth, for the inhabitants of the configuration Balhai are able to offer a new perspectiv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고대사에서 풀리지 않는 점 중의 하나가 말갈에 관한 것이다. 말갈로 불리는 민족은 한반도 남부에서부터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송화강유역까지 분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본기'에서는 동명왕 즉위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백제본기'와 '신라라본기'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숙신, 읍루, 물길 등은 보이고 있으나, 말갈이라는 기록은 "수서"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국내 기록의 말갈에 대해서는 예맥에 대한 별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 측 기록의 말갈은 통상 숙신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서기전 28년부터 등장하고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서 말갈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수서"에는 말갈이 고구려와 인접한 속말말갈을 비롯한 7개의 부로 나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7개의 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금의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북쪽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수 때에 고구려는 백두산과 그 북쪽지역을 말갈에게 빼앗기고 영토가 축소된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의 영역내에 말갈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이 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영역내에 말갈인이 거주하였다면 이들 말갈인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거주하다가 고구려에 복속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는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나 말갈인들에게 빼앗긴 것인지, 또는 고구려가 말갈인들을 점령하고 이들 중 일부를 이 지역으로 사민한 것인지 하는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고에서는 "수서" 「말갈전」의 기록과 다른 관련 기록을 비교하여 말갈 7부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2절에서는 "수서" 「말갈전」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관련 기록을 비교하여 말갈 7부의 위치와 거주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3절에서는 이들 7부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와 고구려 영역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들의 양상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한국 고대사의 한 수수께끼인 말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 결과의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말갈을 비롯한 주변세력의 동향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에도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우리민족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고민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 복속시켰으며, 점령지 주민 중 일부는 사민을 시켜 고구려 내부에서 살게 하였다. 말갈의 존속 양태를 보았을 때 이러한 고구려의 주민 구성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는 영역을 확장하면서 초기부터 점령지를 성읍 또는 군현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사민된 이민족에 대해서는 자치적인 성격을 띠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세력의 양태를 통해서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현재 우리 민족은 한족(韓族)으로써, 이 한족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예족과 맥족, 한족이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융합되어져 한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섯째, 중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역사속지주의(歷史屬地主義)에 입각하여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속민주의(歷史屬民主義)의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 색인어
  • 고구려, 말갈, 수서, 당서,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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