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고사의 『까타밧투註』 서문에는 붓다가 남방7론을 설한 최후에 이 논서의 論母(mātikā)만을 설하시고, 제3결집에 이르러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 Tissa)가 당시 존재했던 부파와 장차 나타날 부파를 파하기 위해 자파의 500經과 타파의 500經으로써 부처가 설한 論母를 ...
붓다고사의 『까타밧투註』 서문에는 붓다가 남방7론을 설한 최후에 이 논서의 論母(mātikā)만을 설하시고, 제3결집에 이르러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 Tissa)가 당시 존재했던 부파와 장차 나타날 부파를 파하기 위해 자파의 500經과 타파의 500經으로써 부처가 설한 論母를 분별하려고 이 경을 설했다고 전한다.
『디파밤사』 등에 따르면 다수의 왕족과 바라문들이 불교교단을 지원해주자 상가의 안이한 생활로 인해 계율이나 수행이 어지러워졌다. 게다가 외도들까지 불교도로 위장하여 그 이익을 챙기려 하였다. 이로 인해 상가가 분열되고 타락하였다. 이때 아쇼카왕의 지지를 받고 목갈리뿟따띳사가 상가를 숙정했다. 즉, 불교를 분별설(Vibhajjavāda)이라고 규정하여 이에 반하는 비구는 추방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1000명의 아라한을 선별하여 ‘법의 결집’을 행하는데 이것이 제3결집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상좌부를 분별설부(Vibhajjavādin)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상좌의 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까타밧투』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곧, 『디파밤사』의 다른 부분과 『사만따빠사디까』 등에서는 『까타밧투』가 성립된 이후 제3결집이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마하밤사』의 경우는 결집중에 『까타밧투』를 편집하고 결집을 마무리했다고 전한다. 법의 결집과 『까타밧투』 성립의 전후관계가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까타밧투』의 성립시기와 제3결집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으면 이 문헌에서 논해지는 학파들의 학설과 논쟁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난해해진다. 역으로 문헌 안에 언급된 학파들의 학설을 통해 이 문헌의 성립배경을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리해 보면, 제3결집 전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쇼카왕 당시에 승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고, 이로 인해 이교도들이 그 이익을 얻고자 승단에 유입하여, 교단이 분열되고 布薩도 충분히 행해지지 않았으며, 정법이 오염되었다. 둘째, 목갈리뿟따띳사가 1000명의 비구와 함께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에서 법의 결집을 행했다. 세째, 목갈리뿟따띳사는 異說을 파하고 정법을 확립하기 위해 『까타밧투』를 저술했다. 이 항목들을 검토해 보면 또 다른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 과연 제3결집과 관련된 이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아쇼카왕 당시에 일어났는가? 둘째, 『까타밧투』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교내부의 타부파의 설을 부정하고 있지, 외도의 설을 타파하거나 외도가 승가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부를 비롯한 제부파의 교리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전 사서에서 제3결집의 원인이라고 지목된 외도의 상가 난입과 이로 인한 계율의 붕괴, 布薩의 불이행 등의 이유에 합치되지 않는다. 셋째, 빠딸리뿟따의 결집에 두 종류가 있다는 설이다. 이는 Andre Bareau의 주장으로서, 하나는 빠딸리뿟따 제1결집으로서 大天의 五事를 기록한 『大毘婆沙論』 권99 등의 자료에 기인하며, 또 하나는 빠딸리뿟따 제2결집으로 여기서 말하는 제3결집에 해당한다. 이점에 대해 金倉圓照는 『대비바사론』에 나타난 대천의 기록은 결집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지적했으나, 이 사건이 그 후 분파의 기원이 되었음은 인정한다. 이 전설에 나타난 제3결집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전설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설, 파탈리풋다에서 있었던 한 부파의 회합에 지나지 않다는 설, 완전히 허구라고 판정하는 설 등, 학자들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결집이 행해지고, 그에따라 異說을 논파하고 자설을 세우기 위해 편찬되었다는 『까타밧투』는 당시 이미 여러 학설들이 난립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까타밧투』의 본문에 등장하는 학파들 가운데는 아쇼카왕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다수 나타난다. 이는 이미 불교가 인도 전역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데, 이 시기에 다시 전도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도불교 전체의 상가행사로서 제3결집을 인정하는 것은 무리이며, 따라서 『까타밧투』의 편집은 상좌부 내부의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인도불교 전체의 상가행사로서 제3결집을 인정하는 것은 무리이며, 따라서 『까타밧투』의 편집은 상좌부 내부의 사건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