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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13-14세기 고려와 요동지역의 경제적 교류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고구려사연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4-077-A00019
선정년도 2004 년
연구기간 1 년 (2004년 12월 01일 ~ 2005년 12월 01일)
연구책임자 위은숙
연구수행기관 영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3-14세기 원간섭기 요동지방은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의해 많은 고려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원간섭기 비록 요양행성의 관할 하에 놓이지만 충선왕이 심(양)왕위에 봉해지고 이후 고려왕실의 후예인 王暠와 脫脫不花가 심왕위를 계승하면서 요동지역과 고려와의 인적, 물적 교류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로든 고려전기나 조선시대에 비해 활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요동과 고려와의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전쟁사를 포함한 정치외교사에 집중되어 있고 경제적 교류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것이 없다. 기껏해야 심(양)왕이 요동지역에 가지고 있었던 경제적 기반과 관련한 연구가 전부이며 이 연구들도 대개 정치사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고려인들이 요동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거기다 원간섭기의 원과 고려의 정치적 관계를 생각할 때 물적 교류 역시 대단히 활발하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실제 국경지대였던 북계(서북면)는 원간섭기 이전부터 요, 금과의 국경무역이 활발하였다.
    비록 요동지역이 원의 요양행성에 편입되었다 하나 원대의 교역정책 등을 짐작할 때 고려와 원 양국간의 교역은 물론이요, 고려에서 원 본토로 들어가는 육상교통로 상에 있었던 요동과 고려와의 교역 관계는 훨씬 활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가 비록 원의 간접통치영역이었다고는 하나 원의 입장에서 보면 넓은 의미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원울루스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원 본토 이상으로 요동과 고려의 교역을 포함한 물적 교류는 활발하였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인적, 정치적 교류 이상으로 향후 고려말 공민왕대 이후 추진되는 요동정벌의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정치외교사에 머물고 있던 원간섭기 고려와 요동관계사를 경제사적 측면에서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첫째, 기존의 한중관계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주로 정치, 외교사가 중심이었고 경제사는 연구성과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필자가 연구주제로 선택한 13-14세기 즉 원간섭기의 요동과의 경제적 교류사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이 연구주제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정치외교사 중심의 요동관계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요동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던 고려민의 존재로만 고려말 요동수복의 의의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를 통해 단순히 인적 토대만이 아니라 활발한 경제교류도 요동지역과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의미가 있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지금까지 원간섭기의 연구에서도 원과의 관계는 주로 정치사에서만의 종속을 강조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독립성을 견지하였다는 쪽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원간섭기의 국가재정의 파탄상태를 단지 고려 국내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개혁의 한계로만 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원에의 재정종속을 설명해야만 원간섭기 국가재정의 혼란상을 구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요동지역과 고려가 대원울루스 내에서 동일 재정권역으로 묶인 것을 밝힘으로서 원간섭기 고려의 재정실태의 현실이자, 원이 요동과 고려를 친연성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고려와 요동의 빈번한 상인왕래와 물자교역의 실태를 통해 그동안 막연히 거론되던 이들 양 지역의 경제교류가 대단히 활발하였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 고려의 대외교역사 연구가 큰 틀에서의 원과의 교역에만 집중하였는데 요동과의 경제적 교역사를 통해 당시 대외교역의 현황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리라 생각된다.
    다섯째, 교통망의 개발은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교통망은 더욱 정비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역사에서 교통망의 분석을 필수적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요동과 고려의 내륙교통망의 실상을 밝히고 실제 원의 참역제도 상에서 설치된 이리간이 그 중요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연구가 원간섭기의 역참제도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 연구요약
  • 첫째, 원간섭기 요동의 고려인 분포규모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여 30여년간 항쟁할 즈음 가장 피해가 컸던 북계의 고려군민들은 상당수가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 요동의 요양, 심양, 서간도 지역에 억류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그 지역에 거주하였다. 또한1231년 홍복원의 반역에서 1270년 최탄의 모반까지 북계(서북면)의 대소토호들은 고려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때 몽고에 투항하면서 자기 관하 고려민호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이 요동지역의 고려민호의 주를 이룬다.
    원에서는 1234년 홍복원에게 이렇게 흘러들어온 요,심 거주 고려항민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심양로는 바로 고려의 항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북계가 1270년 동녕부가 설치되어 원의 요양행성 관할하에 있었던 것은 20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1290년 동녕부가 폐지되어 다시 고려로 들어가자 반기를 든 대다수의 북계지역 토호들은 또 다시 그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요, 심지역으로 옮겨 들어갔다. 그들은 당시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심양로로 들어가지 않고 동녕로를 개설하여 독자적으로 존속하면서 요양행성의 7로의 하나로 되었다.
    이렇듯 점진적으로 요동에 흘러들어간 고려민호는 충렬왕대에 이미 3만명을 상회하였다 한다. 충렬왕대로부터 지속적으로 고려유민 추쇄를 단행하였고, 공민왕때도 요동정벌을 하면서 2,300여호를 귀환시켰으나 본국에 귀환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몽고에서는 심양로와 동녕로의 고려군민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심(양)왕 아래에 둔 것 같으나, 그를 이용하여 오히려 고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들을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음으로서 고려와의 경제적 교류는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둘째. 고려와 요동의 재정적 관계
    요동지역은 요양행성에 편입되어 고려본토와는 달리 직접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따라서 요동지역은 당연히 내지행성이므로 원의 재정권역에 포함되었을 것이나 고려는 간접지배를 받았으므로 외연적으로는 독자적인 국가재정을 운영하였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원의 수탈과 정치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재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고려의 재정이 원에 어느 정도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극히 사료가 드물기는 하나 원에서는 비록 내지행성은 아니나 고려도 큰 범위내에서 원의 재정권에 포함된다고 간주하고 특히 요동과 고려를 근접한 재정권역으로 파악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원은 북계와 동계지역에 동녕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요, 심지역은 심(양)왕과 홍복원 일가 등 토호세력을 이용하여 고려와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분리하고자 하였지만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근접재정권으로 묶어 운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셋째, 고려와 요동의 교역
    충선왕이 요동지역에 가지고 있었던 경제적 기반으로는 懿州의 廨典庫店鋪, 營城과 宣城의 掃里 등이었다. 이들 기반은 이후 고려왕에게 상속되었다. 그 중 의주의 해전고점포는 국왕의 어용을 위해 고려 본국에 설치된 창고기관인 해전고의 출장기관으로 충선왕이 본국으로부터 오는 대량의 포를 전매하여 원 체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의주에 설치한 것이다. 의주는 요양행성관할 요양로에 속한 1영현 2주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의주의 해전고점포는 고려의 물자가 공식적으로 또한 가장 많은 량이 요동에서 거래되는 창구였다. 원간섭기 고려국왕들은 한결같이 왕실재정 확보를 위해 무역을 하였으며, 지배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고려상인들이 5-10인씩 무리를 지어 요양과 심양 등지로 무역하는 상인들이 끊이지가 않았다는 사료는 소규모 상인들의 교역도 당연히 활발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에서 원도로 들어가는 육로교통로에 요동이 위치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원간섭기 무역상인을 주인공으로 한 漢語교본인 ‘老乞大’에서는 주인공이 고려의 개경에서 요동을 거쳐 원도인 大都까지 가서 무역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과 동행하는 중국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요양성에 살고 있던 상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려상인이 요동을 거쳐 북경까지 무역을 하는 것도 대단히 일반적이고, 요동상인의 고려출입 등도 대단히 자유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원간섭기 이전에도 북계 지역은 북방민족과 무역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동녕부가 설치된 후 그 지역의 토호들이 주가 되어 무역에 적극 나섰을 가능성이 있으나 동녕부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요동과의 무역은 크게 어려움없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한글키워드
  • 노걸대,심(양)왕,홍복원,동녕부,서북면,역참제도,홍다구,선성이리간,영성이리간,의주 해전고점포,동녕로,심양로,요양행성,고려항민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고는 주로 정치, 외교사 연구에 머무르고 있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밝혀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연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간섭기 이후 고려에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인구는 사료상으로 짐작컨대 최저 3~4만명에서 최대 8~9만명에 달한다. 이들 요동지역의 고려인이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둘째. 양 지역간 교역은 원대 이전부터 꾸준히 전개되어 왔으나, 원간섭기에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것은 원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던 상업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며, 고려도 왕실부터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위해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등 교역이 활발해 질수밖에 없었던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동에는 懿州에 국왕의 어용을 위해 해전고점포가 개설되어 있었고 고려의 물자가 대량으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고려와 요동상인간의 활발한 왕래가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세째, 원대에는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역참제도가 확립되었다. 수도인 대도를 중심으로 대원울루스 전체를 방사선으로 연결하는 역참제는 대원울루스 운영의 동맥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교통망을 통해 움직이는 것은 군사뿐 아니라 바로 물자였다. 원은 고려에게도 이 대원울루스에 연결되는 역참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교통로 확립이 요동과 고려와는 물론이요, 고려와 원과의 교역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하다. 요양성과 고려의 국경도시 의주 사이에는 8개의 참역이 있었고, 요양과 심양사이에는 영성이리간이 설치되어 양 지역간 경제적 교류의 토대가 되었다.
    네째, 요동은 요양행성에 편입되어있었고, 고려는 원의 간접통치권역이었다. 원은 요동지역을 고려와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요동지역과 고려가 가진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근접재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요동에 기근이 들 경우 고려의 비축미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꾸로 고려에 기근이 들 경우 요동비축미가 기근구제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요동과 고려와의 꾸준한 경제 공민왕말기 요.심지역을 당연히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는 영토의식의 한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 영문
  • The Economic Interchange of Goryeo(高麗) and Yodong(遼東) in 13~14 Centry

    During intervention era of the State of Won(元) in 13~14 centry, Many of Goryeo race was emigrated to Yodong(遼東) region. the State of Won(元) was established Simyangro(瀋陽路) for mandatory of these Goryeo race(高麗人). Simyangro's natives was hazardoused nearly 30,000 people about the record 5183ho(戶). but even if circumstances of Goryeo race was return to Goryeo and Joseon(朝鮮) avoid the State of Won 's confusion, it will be more than 8~90,000. and many of Goryeo race keep one's residence, it was human base of economic interchange of Goryeo and Yodong.
    Goryeo and Yodong region was sprightly trade before the State of Won 's intervention. but at the State of Won's era, the political was active commercial policy for scale up tax income. maybe it was contribute to activate not only trade of Goryeo and the State of Won but also trade of Yodong and Goryeo in to route the State of Won. that era, Goryeo also sprightly trade for appropriation short of finances. there was goods store in Yodong, and activate interchange among Goryeo and Yodong, the State of Won's capital 'daedo(大都)'.
    Though the State of Won's demand, there was maintenance a traffic networt two region. posthouse establishment of Dae Won(大元)-Ulus military rute and physical distribution rute was wide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of more than comparison before era.
    The post-town(驛站) between Goryeo and the State of Won was rute through penetration in Dae Won-Ulus. and it could wide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of more than comparison before era. between Yoyangseong(遼陽省) and the border of Goryeo-Euiju(義州) was eight post-town(站驛), and also, Irigan(伊里干) establish was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between Yoyang(遼陽) and simyang(瀋陽).
    The other side, Goryeo was not directly rule over by the State of Won, because of there was many Goryeo race trailerite, the State of Won was look to be grasp Goryeo and Yodong. That is, when Yodong was famine era, relive to Yodong by mobilize of Goryeo's foodstuffs.
    in this context, because of continue human and material sprightly trade of long time, Goryeo was spread recognition which that Yodong was own a territory, that is, appeared Yodong Reconery Wa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고는 주로 정치, 외교사 연구에 머무르고 있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밝혀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연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간섭기 이후 고려에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인구는 사료상으로 짐작컨대 최저 3~4만명에서 최대 8~9만명에 달한다. 이들 요동지역의 고려인이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둘째. 양 지역간 교역은 원대 이전부터 꾸준히 전개되어 왔으나, 원간섭기에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것은 원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던 상업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며, 고려도 왕실부터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위해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등 교역이 활발해 질수밖에 없었던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동에는 懿州에 국왕의 어용을 위해 해전고점포가 개설되어 있었고 고려의 물자가 대량으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고려와 요동상인간의 활발한 왕래가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세째, 원대에는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역참제도가 확립되었다. 수도인 대도를 중심으로 대원울루스 전체를 방사선으로 연결하는 역참제는 대원울루스 운영의 동맥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교통망을 통해 움직이는 것은 군사뿐 아니라 바로 물자였다. 원은 고려에게도 이 대원울루스에 연결되는 역참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교통로 확립이 요동과 고려와는 물론이요, 고려와 원과의 교역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하다. 요양성과 고려의 국경도시 의주 사이에는 8개의 참역이 있었고, 요양과 심양사이에는 영성이리간이 설치되어 양 지역간 경제적 교류의 토대가 되었다.
    네째, 요동은 요양행성에 편입되어있었고, 고려는 원의 간접통치권역이었다. 원은 요동지역을 고려와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요동지역과 고려가 가진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근접재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요동에 기근이 들 경우 고려의 비축미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꾸로 고려에 기근이 들 경우 요동비축미가 기근구제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요동과 고려와의 꾸준한 경제 공민왕말기 요.심지역을 당연히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는 영토의식의 한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정치외교사에 머무르고 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이 시기 요동지역과 고려 사이에는 단순히 인간적 교류만이 아니라 물적 교류도 활발하였고, 하나의 경제권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요동을 우리의 영토라는 여기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요동지역이 가진 한국사에서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 색인어
  • 요동의 고려인구수, 심양로, 동녕부, 의주해전고점포, 상세, 노걸대, 역참제, 영성이리간, 선성이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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