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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소론계 국학연구와 중화주의의 변용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051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조성산
연구수행기관 고려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7세기 서울․경기지역 西人 사상계는 老少分岐 과정을 통해서 18세기에는 크게 老論 洛論系와 少論系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형성된 소론계는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고유한 학풍을 발전시켰다. 소론의 학맥 구성은 주로 서울․경기지역 서인들과 尹拯과 같은 인물로 구성되었으며, 宋時烈 그룹에 반대하는 가문들이 연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많은 자료들은 윤증이 소론의 중심이 아니라 인조대 主和派와 효종대 申冕 獄事 과정 등을 통해서 형성된 서울․경기지역 西人의 몇몇 유력 가문들이 소론의 사실상 주요 구성원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가문들은 서울․경기지역의 독특한 학문성향이었던 邵雍 象數學과 心學, 經世學에 깊은 학문적 조예가 있었다. 이러한 학문성향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과 小北 가문과의 사상적 결합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枕流臺 學士나 漢黨 그룹들을 들 수 있다. 이들 그룹은 서인이 중심이었지만 소북 계열의 인물들도 적지 않게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인물들 가운데 송시열 그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소론에 가담하였다. 소론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주로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소론계의 蕩平論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또 한편에서는 江華學派의 심성론과 문학론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18세기 후반 달성서씨의 象數學․天文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춰볼 때 소론계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소론계는 학문적으로 볼 때 成渾과 徐敬德 사유의 역사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당파로서 그것이 담고 있는 사상사적 의미들은 결코 작지 않다. 따라서 소론계의 다양한 학문적 성향들을 조명하는 일은 그 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후기의 중요한 사상적 유산들을 되살리는 작업이 될 수 있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자 하는 國學 연구는 계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소론계의 특장처였다. 어떠한 이유로 소론계가 국학연구에 매진했고 이것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지금의 國史․國語 연구에까지 영향을 끼쳤는가는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中國史와 漢文을 학문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중화주의’가 대세였던 당대에 어떠한 이유로 ‘지역적인’ 학문인 국학연구에 이들이 관심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소론계 중화주의와 국학연구의 상관성 문제를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연구가 성실히 수행된다면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조선후기 중화주의의 다양한 의미들을 밝혀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중화주의는 적지 않게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 중화주의는 고정적이고 단일한 의미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고 특정 당파의 전유물로서만 인식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서 각 당파에 따른 중화주의의 의미와 해석이 다양하였고 중화주의의 외연 또한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후기 사학사의 구조적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본 연구는 역사서 서술 주체들의 학맥과 학풍을 중시하면서 사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가령,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강조하였던 인물들은 소북과 소론과 같이 특정 학맥과 관련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적 동향과 역사 연구의 관련성을 통시적․공시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사학사의 구조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3) 조선후기 국어학사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 분야는 조선후기 훈민정음 연구의 확산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소홀한 경향이 있었다. 훈민정음 연구는 조선후기 대중지식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척 중요한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본 연구는 소론계 東音 인식과 訓民正音 연구의 사상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국어학사 연구에 기여하는 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서 중화주의의 의미와 해석, 학문경향과 역사학 연구의 관련성, 국어연구의 사상사적 의미 등이 밝혀진다면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대 역사 주체들이 공유하였던 점과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차이점들이 함께 조명된다면 조선후기 사상사를 좀더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17~18세기 동아시아 사상사 속에서 조선의 중화주의가 갖는 의미들을 보여줄 수 있다. 명청교체 이후 동아시아 사상사는 이전 시대와는 다른 변화를 겪어야 했다. 각국에서 전개된 중화주의 사조는 자국의 사상사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 전개된 중화주의의 양상들을 동아시아사적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이 시기 사상사의 전개를 더욱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중화문명을 배우고 이에 우리 문화 수준을 맞추고자 한 시도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자주 보이는 통시대적 현상이었다. 당대 사람들에게 중화문명은 보편문명의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화문명을 배우고자 하는 노력들을 본 연구과제에서는 ‘중화주의’로 명명하고자 한다.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중국 자체가 시대적으로 다양하였고, 그 해석의 주체 또한 다양하였기에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청교체 이후 실존적 ‘중화’가 사라진 동아시아에서 이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소론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그들의 國學 연구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 세계관과 결합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후기 국학연구가 갖는 다양한 사상적 층위들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소론은 노론계의 지나친 주자학 중심의 중화주의에 반대하였고, 기존 漢黨 이래 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古學 숭상, 국가 주도의 경세학, 조선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하는 의식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중화주의 해석이 노론의 그것과 차이가 날 것임은 명확한 것이었다. 실제 소론의 중화주의는 國境 문제, 故土 회복의식, 북방사 관심 등 ‘부국강병적’ 의미로 상당 부분 연결되고 있었고, 당대 중화보다는 고대 중화의 순정한 문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성이 강했다. 이것은 현실에서 고대사 연구와 訓民正音 연구로 나타났다. 그들의 고대사 중심의 국사연구는 노론과는 다른 중화주의 해석체계에서 말미암았다. 주자학에 입각한 중화주의보다는 古學과 秦漢古文을 숭상하는 중화주의 관념은 조선의 고대문화에 관심 갖게끔 하였다. 그들은 殷나라의 遺風이 면면히 남아있는 조선의 고대 문화를 현양하고 이를 종횡으로 확장하면서 현 조선 문화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고대사의 강역이었던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국경 문제와 국력에 대한 사유로도 이어졌다. 이는 ‘국가’ 중심적인 소론계 경세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7세기 서울․경기지역의 서인과 이 지역 小北系 학풍을 융합하면서 실용적이고 ‘국가’ 중심적 사유를 계승 발전시켰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이 북방지역과 강역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東音 인식과 훈민정음 연구도 소론계의 중화주의 해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중국 古音을 잃어버린 중국의 현재 한자음과 달리 우리 한자음 속에 중국 고대의 正音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인식이 유몽인 이래 南九萬, 李匡師, 柳得恭, 李種徽 등 소론계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고대사 인식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를 중화주의의 전형으로 파악하는 소론계 중화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화주의를 빌어 와 현재 조선의 문화를 현양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자국 언어를 긍정하고자 하였다. 소론계의 조선의 한자음[東音]이 중국의 고음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이를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는 훈민정음 연구로 그 관심을 이동케 하였다. 그들은 훈민정음을 단순히 표음기호가 아닌 한자와 대등한 위상의 언어로까지 인식해가고 있었다. 소론계의 국사와 국어 연구는 소론계 고유의 중화주의 해석에서 말미암았지만 결국 중화주의를 넘어서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시작은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를 완성하고 이를 심화시켜나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화를 넘어서 민족적 주체를 발견하는 작업이 그 내면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국학연구는 중화주의의 허울이 벗겨지면 그대로 자국 문화의 존중이 되어 버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주의적 속성을 갖는 것이었다. 소론계 국학연구를 동아시아 사회에서 일어난 국학연구 경향과 비교해보면 그 위상과 의의가 좀더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의 國學 운동은 본 연구의 주요 비교 대상이 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강화학파,유몽인,남구만,정동유,유득공,국어,국사,국학,중화주의,소론,박성원,홍계희,이희경,이종휘,민족주의,훈민정음,유희,이광사
  • 영문키워드
  • Soron(Young doctrine),the Korean script,Kanghwa school,Hong Gye-hui,Yi Hui-keong,Yi chong-hweui,Yu Deuk-gong,Yu Hui,Chung Dong-yu,Yi Kwang-sa,Nam Gu-man,Yu Mong-in,Sino-centralism,Pak sung-won,nationlism,Korean language,Korean Studies,Korean history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중화문명을 배우고 이에 우리 문화 수준을 맞추고자 한 시도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자주 보이는 통시대적 현상이었다.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중국 자체가 시대적으로 다양하였고, 그 해석의 주체 또한 다양하였기에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청교체 이후 실존적 ‘중화’가 사라진 동아시아에서 이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소론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후 그들의 國學 연구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 세계관과 결합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해보았다. 소론은 노론계의 지나친 주자학 중심의 중화주의에 반대하였고, 古學 숭상, 국가 주도의 경세학을 존중하는 의식 등을 가지고 있었다. 소론의 중화주의는 國境 문제, 故土 회복의식, 북방사 관심 등 ‘부국강병적’ 의미로 상당 부분 연결되고 있었고, 당대 중화보다는 고대 중화의 순정한 문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것은 현실에서 고대사 연구와 訓民正音 연구로 나타났다. 그들은 殷나라의 遺風이 면면 남아있는 조선의 고대 문화를 현양하고 이를 종횡으로 확장하면서 현 조선 문화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고대사의 강역이었던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국경 문제와 국력에 대한 사유로도 이어졌다. 東音 인식과 訓民正音 연구도 소론계의 중화주의 해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중국 古音을 잃어버린 중국의 현재 한자음과 달리 우리 한자음 속에 중국 고대의 正音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인식이 소론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고대사 인식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를 중화주의의 전형으로 파악하는 소론계 중화주의 이념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 소론계의 조선의 한자음[東音]이 중국의 고음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이를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는 훈민정음 연구로 그 관심을 이동케 하였다. 소론계의 자국사와 훈민정음 연구는 소론계 고유의 중화주의 해석에서 말미암았지만 점차 중화주의를 넘어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시작은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를 완성하고 이를 심화시켜나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화를 넘어서 민족적 주체를 발! 견하는 작업이 그 내면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 영문
  • Such trials that we would like to learn China civilization and fit it into our cultural level have been frequently seen throughout the ages in our history. Sino-centralism in history was interpreted in various ways. It is inevitably caused by that fact that China has a variety of ages itself throughout the era, and subjects of such interpreting vary accordingly. In particular, that was even more featuring in East Asia where Sino-centralism in reality disappeared followed by replacement of Myeong Dynasty by Cheong Dynasty. In my research, I have looked into how Sino-centralism in history was interpreted in the latter half of Choson Dynasty based upon Soron faction. After then, I have traced back to how their research on study of Korean literature were combined to the view of world of Sino-centralism they interpreted. Soron was opposed to Sino-centralism led by the doctrines of Chu-tz that Noron faction excessively emphasized, cherishing the mind of admiring the old learning, nation-led state-governing learning, etc. Soron's Sino-centralism was significantly related to meaning of 'a wealthy country and a powerful army' such as issue of nation's border, willingness to recover native territory, and interest in northern direction history, and at the same time they tended to try to pursue of genuine culture of Sino-centralism of ancient times rather than that of contemporary times. That was divided into study on ancient history and study on hun-min-jeong-eum(訓民正音) in reality. They tried to make Choson's ancient culture well-known where tradition and customs of Eun(殷) Kingdom much remained and had emphasize legitimacy of contemporary Choson's culture while expanding it up and down. That led to more interest in northern territory which was a main territory of ancient history and causes of issue of nation's border and nation's power. Recognition of Choson's Chinese character sound and study on hun-min-jeong-eum are deemed good examples of how Soron faction interpreted Sino-centralism. It was widely known in the consciousness of the intelligent of Soron faction that unlike current Chinese that had been lost a old sound as a result of a barbarian 's invasion, our Chinese characters have much a old sound of ancient China. This was closely related to philosophy of Sino-centralism of Soron faction that they identified ancient China to be a stereotype of Sino-centralism just like recognition of ancient Chinese history. The pride that Soron faction cherished in the sense that Choson's Chinese character sound had much of China's old sounds was connected to research on hun-min-jeong-eum that could exactly express such things. Soron faction's local history and research on hun-min-jeong-eum was mainly caused by Soron faction's unique interpreting of Sino-centralism, however it gradually gave rise to getting beyond Sino-centralism without expectation. In other words, it was begun with an intention to complete and further develop Sino-centralism that they had interpreted, but in consequence it leaped over Sino-centralism and was finally on the verge of finding and had been confirming national identity(subject) deeper inside i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중화문명을 배우고 이에 우리 문화 수준을 맞추고자 한 시도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자주 보이는 통시대적 현상이었다. 당대 사람들에게 중화문명은 보편문명의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화문명을 배우고자 하는 노력들을 본 연구는 ‘중화주의’로 명명하였다.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중국 자체가 시대적으로 다양하였고, 그 해석의 주체 또한 다양하였기에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청교체 이후 실존적 ‘중화’가 사라진 동아시아에서 이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역사 속에서 중화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소론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후 그들의 國學 연구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 세계관과 결합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해보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후기 국학연구가 갖는 다양한 사상적 층위들이 드러내고자 하였다. 소론은 노론계의 지나친 주자학 중심의 중화주의에 반대하였고, 기존 漢黨 이래 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古學 숭상, 국가 주도의 경세학, 조선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하는 의식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중화주의 해석이 노론의 그것과 차이가 날 것임은 자명한 것이었다. 실제 소론의 중화주의는 國境 문제, 故土 회복의식, 북방사 관심 등 ‘부국강병적’ 의미로 상당 부분 연결되고 있었고, 당대 중화보다는 고대 중화의 순정한 문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것은 현실에서 고대사 연구와 訓民正音 연구로 나타났다. 그들의 고대사 중심의 국사연구는 노론과는 다른 중화주의 해석체계에서 말미암았다. 주자학에 입각한 중화주의보다는 古學과 秦漢古文을 숭상하는 중화주의 관념은 조선의 고대문화에 관심 갖게끔 하였다. 그들은 殷나라의 遺風이 면면히 남아있는 조선의 고대 문화를 현양하고 이를 종횡으로 확장하면서 현 조선 문화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고대사의 강역이었던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국경 문제와 국력에 대한 사유로도 이어졌다. 이는 ‘국가’ 중심적인 소론계 경세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7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서인과 이 지역 小北系 학풍을 융합하면서 실용적이고 ‘국가’ 중심적 사유를 계승 발전시켰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이 북방지역과 강역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東音 인식과 訓民正音 연구도 소론계의 중화주의 해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중국 古音을 잃어버린 중국의 현재 한자음과 달리 우리 한자음 속에 중국 고대의 正音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인식이 柳夢寅 이래 南九萬, 李匡師, 柳得恭, 李種徽 등 소론계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고대사 인식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를 중화주의의 전형으로 파악하는 소론계 중화주의 이념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화주의를 빌어 와 현재 조선의 문화를 현양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자국 언어를 긍정하고자 하였다. 소론계의 조선의 한자음[東音]이 중국의 고음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이를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는 훈민정음 연구로 그 관심을 이동케 하였다. 그들은 훈민정음을 단순히 표음기호가 아닌 한자와 대등한 위상의 언어로까지 인식해가고 있었다. 소론계의 자국사와 훈민정음 연구는 소론계 고유의 중화주의 해석에서 말미암았지만 점차 중화주의를 넘어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시작은 그들이 해석한 중화주의를 완성하고 이를 심화시켜나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화를 넘어서 민족적 주체를 발견하는 작업이 그 내면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국학연구는 脫中華의 조건들이 이루어지면 그대로 자국 문화의 존중이 되어 버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주의적 속성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화를 통하여 자국 문화를 발견하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해서 보편성을 통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소론계 중화주의와 국학연구의 상관성 문제를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조선후기 중화주의의 다양한 의미들을 밝혀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중화주의는 적지 않게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 중화주의는 고정적이고 단일한 의미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고 특정 당파의 전유물로서만 인식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서 각 당파에 따른 중화주의의 의미와 해석이 다양하였고 중화주의의 외연 또한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후기 사학사의 구조적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본 연구는 역사서 서술 주체들의 학맥과 학풍을 중시하면서 사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가령,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강조하였던 인물들은 소북과 소론과 같이 특정 학맥과 관련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적 동향과 역사 연구의 관련성을 통시적․공시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사학사의 구조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했다. 3) 조선후기 국어학사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 분야는 조선후기 훈민정음 연구의 확산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소홀한 경향이 있었다. 훈민정음 연구는 조선후기 대중지식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척 중요한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본 연구는 소론계 東音 인식과 訓民正音 연구의 사상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국어학사 연구에 기여하는 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서 중화주의의 의미와 해석, 학문경향과 역사학 연구의 관련성, 국어연구의 사상사적 의미 등이 밝혀진다면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대 역사 주체들이 공유하였던 점과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차이점들이 함께 조명된다면 조선후기 사상사를 좀더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17~18세기 동아시아 사상사 속에서 조선의 중화주의가 갖는 의미들을 보여줄 수 있다. 명청교체 이후 동아시아 사상사는 이전 시대와는 다른 변화를 겪어야 했다. 각국에서 전개된 중화주의 사조는 자국의 사상사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 전개된 중화주의의 양상들을 동아시아사적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이 시기 사상사의 전개를 더욱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소론, 중화주의, 국학, 국사, 국어, 훈민정음, 민족주의, 강화학파, 유몽인, 남구만, 이광사, 정동유, 유희, 유득공, 이종휘, 이희경, 홍계희, 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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