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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대의 麗元關係의 형성과 그 특징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032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김현라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일찍부터 고려의 대외관계사의 연구는 여타 부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 양이 많지 않다. 그것은 조선의 경우 그 대상국가와 지역이 중원과 명·청에 한정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고려는 여러 왕조와 지역에 걸치고 있다. 즉 요·금·원·송이 그 대상국이며 지역적으로도 각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성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대치되어 있어 고려의 대외관계사 연구의 어려움은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송을 제외한 각 왕조가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므로 각 종족의 특징을 구명해야만 그 시대의 특징을 알 수 있다.
    특히 대외관계사 연구의 어려움을 더하는 것은 자료의 활용이다. 그것은 중국 중원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발원하여 성장하는 왕조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자료의 활용은 상당히 아쉽다고 하겠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하여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대적으로는 고대사에 한정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고려왕조과 원제국과의 관계는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식민사관과 관련지울 수 있는데, 바로 고려왕조도 중국과의 전쟁의 피해자이며 또한 종속적인 역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가 해방이후가 되면서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식민사관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써 고려의 대외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민족사적인 시각에서 줄곧 연구되어 원제국의 속국 가운데 유일하게 고려만이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물론 관계사 연구에서 그에 속한 왕조의 위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서로 인접한 모든 국가 내지 왕조에 대한 자료 수집이 필수적이며, 그러한 자료의 바탕에서 연구되어야한다. 그러나 현재 여원관계사는 ꡔ고려사ꡕ 등의 국내자료에만 한정되어 그 실체를 밝혀내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려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속에서 동아시아 속의 고려의 위상을 올바로 그려내지 못한 한계가 지적된다.
    연구자가 연구하려는 대상도 바로 여원관계사의 일부이다. 원은 고려 500년 가운데 거의 1세기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왕조이다. 그것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일상사에까지 이르고 있다. 연구자들이 이 시기를 원간섭기, 원지배기, 원압제기라고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만큼 원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여원관계의 기본적인 구도를 마련하는 시기가 고려 충렬왕대이다. 충렬왕은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어 그 위상이 높은 국왕이었다. 충렬왕은 이러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양국관계의 틀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 시기의 여원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세조구제’이다. 세조구제라는 것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통치방식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물론 이 원칙은 고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원관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국이 원과 고려이므로 대고려지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세기에 달하는 원간섭기에 세조구제 원칙이 줄곧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원제국 내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부분의 변화상을 그리는데 가장 중요한 잣대로 하는 것이 세조구제라고 연구자들이 언급하면서도 이에 대한 구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지 않다. 이것은 이 시기의 외교를 단순히 정치세력 또는 그 흐름에서만 보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중관계문제를 다룰 때 가장 세심하게 살필 것은 중국의 중화사상, 구체적으로 보면 조공책봉체제에 대한 선행연구이다. 이 연구가 전제가 된다면 쿠빌라이가 구현하려고 했던 세조구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와 아울러 충렬왕대 고려 내부의 여러 변화도 함께 살펴보면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변화 속에서 충렬왕대의 고려의 위상을 아울러 볼 수 있는 시각을 기를 수 있다고 본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자의 연구가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한중관계사의 연구에서 고려만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 속의 고려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동아시아의 외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공-책봉체제에 대한 보다 정치적인 구명을 통해 새로운 고려시대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이 외교사적으로 인연을 맺어온 2000여 년의 역사를 보다 역동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까지도 제시가 가능하리라 본다.
    둘째, 동아시아 속의 고려의 위상이 잘 구명된다면 원간섭기 고려의 정치·경제·사회 전 부분에 이르는 변화상의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시기 고려의 정책을 고려의 자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주체로서 국왕의 위상 또는 역할을 가늠하거나 또는 국내의 정치를 단순히 부원세력 대 반원세력으로 구분하여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계가 극복된다면 고려의 내부변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역사의 발전상을 구명해 볼 수 있다.
    셋째, 이상의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일정한 결과가 도출된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해야할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역사관과 국가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연구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몽고가 중국을 지배하고 막북지역에서 중원지역으로 그 중심을 이동했던 시기가 바로 세조 쿠빌라이대이다. 쿠빌라이는 그가 분봉받았던 지역이 중원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문화에 친숙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원 황제위에 오른 후에는 적극적으로 한법을 수용하여 중국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쿠빌라이는 중국 주변국가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은 역대로 중화사상, 즉 조공-책봉관계로 주변국가와 관계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한법의 구체성은 조공-책봉체제일 것이다. 따라서 이 체제를 좀 더 구명하면 세조의 대고려정책의 큰 기둥인 소위 ‘세조구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의 구체화는 원의 법률 속에서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원사]나 [경원조법] [지원신격] [통제조격] 등의 자료에서 세조가 구현하고자 했던 정책의 일부를 살펴 대고려정책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한다.

    2. 충렬왕대의 외교와 정책
    고려에 원이 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최우집권기부터이다. 이때부터 약 40년간의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여원관계가 형성된다. 이후 원종대에 강화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가 이루어지고 충렬왕의 결혼을 통해 원의 부마국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결혼으로 충렬왕의 입지는 국내외적으로 다져졌지만 세조의 대고려정책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어떻게 이루어내는가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충렬왕대의 대원외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6사’문제이다. ‘6사’는 원의 일정한 영향으로 고려 왕정이 복구된 이후 원이 고려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 ‘6사’의 부담이 외부로 드러나듯 일부 경감 또는 삭제된 것을 충렬왕대의 외교적 성과로 보고 있다. 또 그것이 이후 ‘세조구제’로 언급되면서 고려의 자주성과 관련짓고 있다.
    그러나 ‘6사’ 부담의 변화는 충렬왕의 외교적 노력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원제국 내부의 정책변화와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례로 ‘6사’ 가운데 원의 호계제도에 따른 고려 민호의 파악이 실시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의 자주성 또는 충렬왕의 외교적 성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대사 연구에서 보면 이 시기의 원의 호계방식에 의한 민호파악은 원 내부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원제국의 정책 변화가 고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방적으로 고려에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외교로 보기에는 일정한 한계로 지적된다. 이는 역참제도의 실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원의 역참의 기능과 운영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 고려의 요구에 의해 40개의 역참을 20개로 줄였다는 것을 들어 고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3. 원제국 하의 고려의 위상
    이상의 원 세조 쿠빌라이의 대고려정책과 그에 맞물린 충렬왕의 외교정책을 살펴 실제 과연 고려의 위상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려의 자립성을 적극적으로 보려는 연구자들은 충렬왕과 또는 충선왕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와 반대로 이 시기의 원의 영향을 중시하여 이들의 정책뿐만 아니라 이 때 설치된 정동행성 등 각종 기관이나 사신으로 온 인물들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연구도 여원관계사를 다루는 시각의 중심에 ‘고려’만이 있고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원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피지 않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상의 연구가 진행된다면 보다 구체적인 고려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세조구제,법전,여원관계,공물,조공책봉체제,결혼정책,외교,중화사상,충렬왕,원제국
  • 영문키워드
  • Sinocentrism,King Chungrul,diplomacy,Relation of Koryo-yuan,Tribute,King Sejo,A policy of marriage,Relay,Tribute and Installation,A code of laws,The policy of King Sejo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려는 몽골과 접촉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몽골의 내부사정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세조 쿠빌라이는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제국의 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한법적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바라는 한법적 체제라는 것은 바로 중원을 지배해 왔던 한족이 지향했던 중화사상, 즉 황제지배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이러한 한법적 체제의 적용도 몽골 내부 사정으로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몽골민족의 근원지인 막북지역을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전통인 유목적 습속을 버리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목적 습속은 바로 분봉체제를 가리킨다. 쿠빌라이가 충렬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던 것은 바로 혈족에게 수여하는 분봉체제를 통하여 그의 정권의 안정화를 바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편으로 쿠빌라이의 견제대상이었던 요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제가의 옷치긴 왕가의 견제로서 실행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가 1260년대부터 설치한 많은 기구도 옷치긴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쿠빌라이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현되자 중화사상을 본격적으로 고려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중화사상은 바로 황제지배체제를 통한 제후국의 실질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에 충렬왕 5년을 전후로 고려에 대한 지배의 틀을 마련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충렬왕 13년에 옷치긴 왕가의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쿠빌라이가 70대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친정군을 이끌었다는 것은 쿠빌라이정권에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바라던 한법체제에 의한 실질적 지배가 실현되었다.
    몽골제국기에서 가장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성종치세기이다. 성종은 자신과 혈족관계가 더 깊은 충선왕을 고려왕위에 올려 대고려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왕조 본연의 제도로 회귀하고자 하자 즉각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그는 충렬왕을 복위시켰지만 다루가치의 파견 등을 통하여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이러한 대몽골제국의 대고려정책의 변화 속에서 충렬왕은 먼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그는 국내의 부원세력을 견제하고, 또한 친조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러한 결실이 충렬왕 4년에 부마라는 관직의 하사이다. 충렬왕은 비록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부마의 위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것이 이때에 실현되었고 이후 대몽골제국에서 파견한 사신이 비로소 충렬왕과 신하의 위치에서 공무를 보았다.
    이후 그의 대몽골제국에 대한 의무는 부마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책임으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어 충렬왕 13년 나얀반란이 발발했을 때 적극적인 참전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을 두고 세조구제와 관련된 ‘6사’의무의 변질이며 세조구제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충렬왕은 고려와 인접한 옷치긴 왕가의 견제라는 쿠빌라이의 정책의 실현과 관련된다. 그러나 세조의 황제지배체제의 구현은 나얀반란 이후 잘 시행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충렬왕은 나얀반란 이후 나얀의 잔당인 카단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려의 사정을 악화시켰다. 고려민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고 심지어 강화도로 국왕이 피신을 가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자인 충선왕의 입지는 다져졌고,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충렬왕은 8개월 이후에 복위하였다. 그러나 복위 이후에도 충렬왕은 이전의 위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과 무종 등의 대고려정책은 실질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그 거점은 요동지역이 되었다. 이에 대몽골제국은 충선왕을 심왕으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혈족에게 사여하는 분봉체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영문
  • Geryeo had been changed a lot after making a contact with Mongolia. Phenomenally Geryeo had to accept a direct and indirect influence by Mongolia. The influence was deeply related with Mongolia’s internal affairs. After Kublai Khan acceded to the throne, He wanted to set a "Hanbub"system as a way of unification of the empire. However, his grasping political power was not normally accomplished; he did not overcome his own ultimate limitation. The "Hanbub" systemKublai Khan wanted to set in his country was the "Sinocentrism"(the Emperor system) that Hanjok headed for. Therefore, in the areas Kublai Khan conquered, they let them keep their own tradition but in stead, had a courtesy etiquette. After the centralization of Kublai Khan Regimecame out successfully, Kublai Khan decided to control Geryeo substantially that meant participating in throne as well as internal affairs. The participation of Mongolia could it be possible because a particular area called Yodong was under Kublai Khan Regime.
    Chungnyeol of Goryeo conducted many political measures in order to strengthen a career of himself under the Kublai Khan’s political changes to Goryeo. First of all, he checked a power that was in collusion with Won and grew his statue through having an audience of the Emperor of Won. Chungnyeol established the son-in-law status of the Emperor of Won and took a full responsibility of the position for Won. For instance, he expressed an active participation in internal disturbance of the Mongolian Empire.
    However, his status and effort headed for Won had been weakened because of Kublai Khan’s death and Sungjong’s accession to the throne. Sungjong wanted to have a direct control over Goryeo through Yodong and chose Chungsun who was a son of Chungnyeol.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려는 몽골과 접촉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몽골의 내부사정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세조 쿠빌라이는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제국의 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한법적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바라는 한법적 체제라는 것은 바로 중원을 지배해 왔던 한족이 지향했던 중화사상, 즉 황제지배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이러한 한법적 체제의 적용도 몽골 내부 사정으로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몽골민족의 근원지인 막북지역을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전통인 유목적 습속을 버리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목적 습속은 바로 분봉체제를 가리킨다. 쿠빌라이가 충렬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던 것은 바로 혈족에게 수여하는 분봉체제를 통하여 그의 정권의 안정화를 바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편으로 쿠빌라이의 견제대상이었던 요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제가의 옷치긴 왕가의 견제로서 실행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가 1260년대부터 설치한 많은 기구도 옷치긴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쿠빌라이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현되자 중화사상을 본격적으로 고려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중화사상은 바로 황제지배체제를 통한 제후국의 실질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에 충렬왕 5년을 전후로 고려에 대한 지배의 틀을 마련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충렬왕 13년에 옷치긴 왕가의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쿠빌라이가 70대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친정군을 이끌었다는 것은 쿠빌라이정권에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바라던 한법체제에 의한 실질적 지배가 실현되었다.
    몽골제국기에서 가장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성종치세기이다. 성종은 자신과 혈족관계가 더 깊은 충선왕을 고려왕위에 올려 대고려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왕조 본연의 제도로 회귀하고자 하자 즉각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그는 충렬왕을 복위시켰지만 다루가치의 파견 등을 통하여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이러한 대몽골제국의 대고려정책의 변화 속에서 충렬왕은 먼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그는 국내의 부원세력을 견제하고, 또한 친조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러한 결실이 충렬왕 4년에 부마라는 관직의 하사이다. 충렬왕은 비록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부마의 위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것이 이때에 실현되었고 이후 대몽골제국에서 파견한 사신이 비로소 충렬왕과 신하의 위치에서 공무를 보았다.
    이후 그의 대몽골제국에 대한 의무는 부마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책임으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어 충렬왕 13년 나얀반란이 발발했을 때 적극적인 참전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을 두고 세조구제와 관련된 ‘6사’의무의 변질이며 세조구제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충렬왕은 고려와 인접한 옷치긴 왕가의 견제라는 쿠빌라이의 정책의 실현과 관련된다. 그러나 세조의 황제지배체제의 구현은 나얀반란 이후 잘 시행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충렬왕은 나얀반란 이후 나얀의 잔당인 카단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려의 사정을 악화시켰다. 고려민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고 심지어 강화도로 국왕이 피신을 가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자인 충선왕의 입지는 다져졌고,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충렬왕은 8개월 이후에 복위하였다. 그러나 복위 이후에도 충렬왕은 이전의 위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과 무종 등의 대고려정책은 실질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그 거점은 요동지역이 되었다. 이에 대몽골제국은 충선왕을 심왕으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혈족에게 사여하는 분봉체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한중관계사의 연구에서 고려만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 속의 고려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동아시아의 외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공-책봉체제에 대한 보다 정치적인 구명을 통해 새로운 고려시대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이 외교사적으로 인연을 맺어온 2000여 년의 역사를 보다 역동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까지도 제시가 가능하리라 본다.
    둘째, 동아시아 속의 고려의 위상이 잘 구명된다면 원간섭기 고려의 정치․경제․사회 전 부분에 이르는 변화상의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시기 고려의 정책을 고려의 자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주체로서 국왕의 위상 또는 역할을 가늠하거나 또는 국내의 정치를 단순히 부원세력 대 반원세력으로 구분하여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계가 극복된다면 고려의 내부변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역사의 발전상을 구명해 볼 수 있다.
    셋째, 이상의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일정한 결과가 도출된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해야할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역사관과 국가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연구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쿠빌라이칸, 충렬왕, 외교, 한법체제, 세조구제, 성종,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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