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국에서 방송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에 관한 기초적이며 실증적인 연구이다.
종전 후 미국의 소리는 기구와 인원이 크게 감축되고 소속도 국무부의 ‘국제방송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한국어 방송은, 미군의 점령 ...
본 논문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국에서 방송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에 관한 기초적이며 실증적인 연구이다.
종전 후 미국의 소리는 기구와 인원이 크게 감축되고 소속도 국무부의 ‘국제방송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한국어 방송은, 미군의 점령지역이며 좌우 대립이 심하던 한반도를 향한 방송이었으므로, 그 기구와 인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단파 외에 중파로도 방송하게 되었고, KBS에서도 오전과 저녁 프라임 타임에 중계하였으므로 청취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미국정부의 선전매체였으므로 미국정부의 세계전략에, 좁게는 대한정책에 따라서 방송 정책이 수립되고 운용되었다. 남한 점령 초기부터 1946년 9월 한국문제의 유엔이관까지의 방송 정책은 우익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좌익을 몰아세우지는 않았으나, 제헌선거 국면에서는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하였다. 미국의 소리가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매체로서 공정성과 정확성과 중립성 등을 표방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선전매체라는 성격과 기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결정적 순간에서는 선전방송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한국어 방송의 기본 프로그램은 뉴스, 논평, 특집, 드라마, 음악이었다. 뉴스는 미국뉴스를 포함한 세계뉴스와 남한뉴스로 구분되었고, 논평은 뉴스의 의미를 해설하거나 그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이었고, 드라마는 극화한 뉴스쇼였다. 음악방송은 청취자의 관심을 끌고 프로그램 사이에 집어넣는 막간 프로그램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집은 미국을 알리거나 민주주의와 문화 등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하루 두 차례 방송된 한국어 방송의 총 방송시간은 적게는 45분과 1시간, 많게는 1시간 30분에 달하였다. 각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은 신축적으로 정해졌고, 뉴스 시간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논평 시간이었다. 드라마와 음악 시간은 뉴스와 논평에 비하여 훨씬 적게 할당되어 전체 방송시간의 약 20% 전후였다.
방송 주제와 내용의 기조는 미국정부와 군정의 선전에 관련 것이었다. 따라서 방송 주제는 반공에 집중되었고, 미국정부의 대한정책과 미군정, 대외정책, 그리고 소련의 ‘침략주의’와 공산권의 동향을 중요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1947년 하반기부터는 공산주의 비판의 수위가 높아졌고, 공산 측의 선전에 대응하는 역선전 방송도 강화되었다. 또 다른 주요한 주제는 생활양식, 정치와 경제, 학문과 예술, 인물 등 미국 자체를 소개하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뉴스와 논평 프로그램에서는 정치적 성격이 강한 것을, 특집에서는 미국 사회와 문화를 전달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1950년 5월에 나온 ‘미국의 소리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 조사’를 통해서 보면, 90%의 응답자가 미국의 소리를 청취하였고, 대학생과 정부관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청취하였다. 선호하는 프로그램은 뉴스, 논평, 음악, 특집의 순이었다. 뉴스에서 더 자세히 듣기를 원하는 주제는 과학이라는 응답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는 미국에 관한 것이었다. 20대 이하가 좋아한 특집 중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것은 ‘당신의 과학’, ‘미국의 문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프로그램 가운데 선호도가 낮았던 것은 별로 없었지만, 아나운서의 발음과 어휘와 전달력 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청취자층이 광범위하였으며, 특히 고학력자와 영향력이 큰 계층이 주요한 청취자였고, 지방보다는 서울 거주자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청년층보다는 중장년층이 규칙적으로 청취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방송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적어도 청취자 조사 결과를 본다면, 방송 효과는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소리가 전체 남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소기의 효과를 얼마나 거두었는지 살펴본다면,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해방 이후 라디오가 20만 대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라디오 청취자였고, 또한 그 중 일부가 미국의 소리를 청취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소리는 한국인의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고, 선전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다만 미국의 소리 청취자가 엘리트층이었고, 높은 호응을 보였다는 것은 남한과 미국의 제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