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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後期末期 胡風과 胡化 -孝文帝의 漢化政策과 胡族漢化論의 실상과 허상-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박사후국내연수)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9-351-A00185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2 년 (2009년 09월 01일 ~ 201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최진열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北魏는 이민족이 세운 왕조이지만, 遼(契丹)․金(女眞)․元(몽골)․淸(滿州) 등 다른 이민족 왕조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발적인 同化, 즉 漢化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다른 왕조에서는 皇帝들이 자기 種族의 漢化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 데 비해 北魏의 孝文帝는 胡族支配層에게 胡語와 胡服을 금지하고 漢文化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기존에는 孝文帝의 漢化政策이 그대로 실현되었고, 漢化된 北魏의 胡族支配層은 文弱과 사치에 빠졌고, 北魏前期 수도인 平城 북쪽의 六鎭에 거주하던 胡族들과 문화적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漢化된 洛陽의 胡族支配層과 여전히 胡化를 유지한 六鎭의 胡族들 사이의 계급모순이 六鎭의 난을 통해 표출되어 北魏를 붕괴시켰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전개는 北魏의 멸망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의 정설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孝文帝가 추진한 漢化政策의 실제 실시 여부를 의심하거나 이를 검증한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일부 혹은 전부를 지배한 이민족 정권은 반드시 漢人들에 동화되었다는 同化論를 믿고 있으며 이를 입증하려고 한다. 최근 孝文帝의 漢化政策을 평가하는 논문이 대량으로 나온 것도 이러한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 연구자는 中國의 民族政策을 비난할 의도는 없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는 것인 만큼, 이를 벗어나 객관적으로 검증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는 孝文帝가 漢化政策을 추진하였지만, 拓跋氏를 정점으로 한 鮮卑․匈奴 등 중국 내지로 들어온 이민족들은 어느 정도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풍속과 문화의 측면에서 밝히고자 한다. 기존의 학자들이 간헐적으로 제기하거나 사료에서 지나친 문제, 즉 洛陽遷都 이후 자신의 부락과 洛陽을 번갈아 오가며 생활했던 雁臣의 존재, 尒朱榮의 일화에서 발견되는 鮮卑 혹은 다른 유목민들의 노래와 춤, 胡服, 육류와 유제품 등 먹거리 문화, 사냥, 收繼婚의 유습, 유목민들의 방향감각 등의 예를 종합하면, 孝文帝의 漢化政策 이후에도 이민족들은 여전히 자신의 胡族的 혹은 騎馬的 문화를 유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北魏의 지배층이었던 拓跋氏 등 이민족들이 완전히 중국인으로 동화(중국 학자들의 표현으로는 ‘全般漢化’)된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北魏의 붕괴 원인을 찾기 위해 이를 孝文帝의 ‘漢化政策’과 꿰어 맞추는 기존의 개설서 혹은 통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전파와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것이 아니라는 실증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본 연수과제는 北魏史를 기존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실증을 통해 재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기존의 학설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고 새로운 독창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수과제는 실증과 검증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개설서에 보이는 기존의 통설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님을 학계에 환기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同化論과 中華民族論을 바탕으로 추진적인 소수민족의 탄압과 동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주장이 연구계획서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北魏後期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문제는 필자의 박사논문 주제인 北魏皇帝들의 巡幸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다. 孝文帝가 洛陽遷都한 이후 南齊 정복을 위해 親征하느라 都城을 비운 시기가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孝文帝가 胡語․胡服․胡姓 등 각종 胡俗을 금지시켰지만, 胡人들이 孝文帝를 따라 南齊 征伐에 동원되어 漢人들의 문화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孝文帝도 정책이 제대로 실시되었는지 감독할 여유가 없었음은 당연하다. 양자를 관련지으면 北魏後期 胡俗의 유지는 孝文帝의 巡幸 혹은 親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논지를 보강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北魏後期 이민족들의 胡俗, 즉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계속 유지했음을 입증함으로써 孝文帝가 추진한 漢化政策의 실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다른 학문분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현재 복식사․미술사․음식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각자의 영역에서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北魏後期에 여전히 漢化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 연수과제의 결론은 이들에게 문헌사학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문헌사학과 기타 학문의 연구성과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본 연수결과는 복식사와 미술사 연구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본 연수과제의 결론은 孝文帝의 胡俗 금지 정책이 의도했던 대로 관철되지 못하였음을 입증하여 北魏가 다른 이민족 왕조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민족 왕조와 공통점을 지녔음을 밝힐 수 있다. 즉 기존의 설명대로 五胡十六國과 北朝時代의 胡族國家를 침투왕조 혹은 잠입왕조로, 契丹․女眞․몽골․滿洲를 정복왕조로 구분하는 기존의 이분법이 잘못되었음을 환기할 수 있다. 즉, 기존에는 五胡十六國과 北朝時代 이민족왕조가 일방적으로 동화되었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도식과 이분법이 잘못되었음을 밝힘으로써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왕조 전체에 대한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다.
    아울러 본 연수과제는 현재 中國學界의 맹목적인 同化論적인 少數民族 및 異民族王朝의 연구와 漢化論으로의 편향을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함으로써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수과제는 연수자의 박사논문인 北魏皇帝들의 巡幸에서 부족했던 巡幸이 北魏社會, 특히 지배층인 이민족들에게 끼친 영향에 관한 내용을 보강할 수 있다. 반대로 北魏皇帝들의 잦은 巡幸과 親征은 孝文帝의 漢化政策 실시 이전과 이후의 시기에도 여전히 이민족들이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한계를 지니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해 준다. 北魏前期에는 皇帝들이 陰山․河西(오르도스)․漠南․漠北 등 유목민들의 거주지역을 주로 巡幸하였는데, 이는 이민족 지배층들이 漢人들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배경 설명이 가능하다. 孝文帝의 漢化政策 선언 이후에도 孝文帝가 잦은 親征으로 都城인 洛陽을 비웠는데, 이는 孝文帝를 따라 전쟁터에 나선 鮮卑 등 이민족들이 중국의 문화를 학습할 수 없었던 배경이 된다. 이처럼 본 연수과제는 연수자의 박사학위논문과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박사논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연수자의 학문적 성과를 한단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과제에서는 洛陽遷都와 ‘漢化政策’ 이후 胡人들의 생활을 살펴봐도 胡人들의 풍습이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孝文帝는 洛陽遷都 이후 洛陽으로 이주하기 싫어하는 胡人들을 달래기 위해 봄과 여름을 자신의 부족에서 보내고 가을과 겨울에 洛陽에서 생활하는 ‘雁臣’의 특권을 허용하였다. 기존에는 北魏前期 平城에 살았던 胡人들이 모두 洛陽에 이주했다고 보았지만(소위 代遷戶), 이런 雁臣의 특권을 가진 胡人들이 중국의 북변과 洛陽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면, 실제 代遷戶의 수는 적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遊牧생활을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漢化’에 전염될 가능성이 적었다. 이는 北魏末 발호했던 尒朱榮의 생활에서 확인된다. 또 孝文帝가 親征에서 돌아와 洛陽에 胡服을 입고 다니는 여성을 보고 任城王 元澄을 질책하였는데, 이때는 孝文帝가 죽던 해이며 胡服착용 금지조치가 실시된 지 5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는 사실상 胡服금지의 실패를 말해 준다. 北魏末 洛陽을 점령했던 梁의 陳慶之는 洛陽에서 胡服과 胡靴를 사용하던 모습을 목격했으며, 梁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陳慶之 부자는 이를 애용하였다. 이는 北魏가 망할 때까지 胡服과 胡靴가 적어도 洛陽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인데, 6세기 초 賈思勰이 지은 齊民要術에 胡人들의 음식들이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北魏後期에는 胡人들뿐만 아니라 일부 漢人들도 양고기와 양젖 등 胡人들의 음식을 먹었다. 예컨대 太和 18년(494) 南朝에서 망명했던 王肅은 몇 년이 지나 孝文帝가 주최한 궁중의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는 孝文帝와 다른 관료들처럼 양고기와 酪漿․酪粥같은 유목민들이 먹던 음식을 여전히 먹었다. 요컨대 胡人들의 의식주는 ‘漢化政策’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또 北魏後期의 사료를 보면 北魏의 皇帝들과 宗室 남성들이 사냥을 즐기는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다. 北魏前期부터 胡人들이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이는 자신들의 習俗을 계속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宣武帝의 후궁이자 孝明帝의 생모인 胡太后는 漢人이었는데도 활쏘기에 능했고 즐겼다. 이는 尙武的인 胡俗이 宮中에 만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유목민 특유의 收繼婚이 北魏皇室에서 일부 발견되는데, 이 역시 北魏後期 胡俗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北魏後期 胡語사용의 정황은 胡人들의 방향감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목민들의 습속에 보이는 “동→남→서→북”의 방향감각이 北魏前期뿐만 아니라 後期에도 보인다. 말이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현대 언어학의 연구를 곱씹어보면 北魏後期에도 胡人들이 자신들의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胡語를 여전히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漢化政策’ 이후에도 胡人들은 자신의 말을 사용했으며, 자신들의 생활과 습속을 유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漢人들의 언어와 문화를 즐겼을 수도 있다. 반대로 胡俗이 漢人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齊民要術󰡕에 胡人들의 음식이 대거 기록되어 있으며, 漢人官僚들이 胡服을 입었고, 胡笳․羌笛․琵琶 등의 악기가 유행하였다. 그리고 五胡十六國․北朝시대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으며, 전통 중국사회에서 惡德으로 보았던 妬忌의 풍조가 북조시대에 성행하였고, 唐代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北魏後期에 胡人들이 ‘漢化’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혹자는 필자의 주장이 극단적인 예만 모아 놓은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현재 자료의 한계 때문에 北魏後期 胡人들이 漢文化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胡俗만을 고집했는지, 양자를 모두 수용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필자가 논증한 증거들은 동화론자들의 주장, 즉 孝文帝의 ‘漢化政策’ 이후 洛陽으로 이주한 胡人들은 “완전히 漢化되었다”는 ‘全般漢化’論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孝文帝의 선언적인 정책만을 과신하고 실제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고 ‘漢化’만을 주장하는 것은 동화론에 사로잡힌 태도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北魏後期 胡人들이 ‘全般漢化’되지 않았으며, 北魏 皇室을 중심으로 胡語와 胡俗을 여전히 유지했던 계층이 적지 않았다고 절충적인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점술,혼외정사,결혼,胡語,문화,의식주,胡俗,胡化,漢化,漢化政策,孝文帝,유목민의 음악,전반한화,동화론,雁臣,방향감각,禮制,풍속,收繼婚制
  • 영문키워드
  • Assimilation Theory,Normad's Music,Perfect Sinicization of Normad(Barbarians),Sinicization of Normad(Barbarians),Sinicization policy,Xiaowen emperor,a sense of direction,Rites Prescription,Normad Customs,Marriage,Yanchen,Levirate,Xianpei Language,Culture,clothing and shelter,food,Normad or Pastoral Culture,Maintaining of Normad's Culture or Customs,sexual relations,extramarital sex,Normad's Divin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에서 洛陽遷都와 ‘漢化政策’ 이후 胡人들의 생활을 살펴봐도 胡人들의 풍습이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孝文帝는 洛陽遷都 이후 洛陽으로 이주하기 싫어하는 胡人들을 달래기 위해 봄과 여름을 자신의 부족에서 보내고 가을과 겨울에 洛陽에서 생활하는 ‘雁臣’의 특권을 허용하였다. 기존에는 北魏前期 平城에 살았던 胡人들이 모두 洛陽에 이주했다고 보았지만(소위 代遷戶), 이런 雁臣의 특권을 가진 胡人들이 중국의 북변과 洛陽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면, 실제 代遷戶의 수는 적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遊牧생활을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漢化’에 전염될 가능성이 적었다. 이는 北魏末 발호했던 尒朱榮의 생활에서 확인된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인데, 6세기 초 賈思勰이 지은 󰡔齊民要術󰡕에 胡人들의 음식들이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北魏後期에는 胡人들뿐만 아니라 일부 漢人들도 양고기와 양젖 등 胡人들의 음식을 먹었다. 예컨대 太和 18년(494) 南朝에서 망명했던 王肅은 몇 년이 지나 孝文帝가 주최한 궁중의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는 孝文帝와 다른 관료들처럼 양고기와 酪漿․酪粥같은 유목민들이 먹던 음식을 여전히 먹었다. 요컨대 胡人들의 의식주는 ‘漢化政策’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또 北魏後期의 사료를 보면 北魏의 皇帝들과 宗室 남성들이 사냥을 즐기는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다. 北魏前期부터 胡人들이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이는 자신들의 習俗을 계속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宣武帝의 후궁이자 孝明帝의 생모인 胡太后는 漢人이었는데도 활쏘기에 능했고 즐겼다. 이는 尙武的인 胡俗이 宮中에 만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北魏後期 胡語사용의 정황은 胡人들의 방향감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목민들의 습속에 보이는 "동→남→서→북"의 방향감각이 北魏前期뿐만 아니라 後期에도 보인다. 말이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현대 언어학의 연구를 곱씹어보면 北魏後期에도 胡人들이 자신들의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胡語를 여전히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北魏後期 洛陽 출토 陶俑의 복식 분석에 관한 논문에서 北魏後期 수도인 洛陽에서 출토된 陶俑의 복식을 분석하였다. 胡服과 胡帽를 착용한 陶俑은 전체 陶俑의 12%(53개) 혹은 13.9%(68개)였고, 胡服과 非胡帽를 착용한 陶俑은 12.4%였다. 모자를 제외한다면 유목민의 복식인 胡服을 입은 도용은 전체의 1/4이었다. 그러나 조사 대상이 된 陶俑의 수가 적다는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계수치와 비중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494년 孝文帝의 胡服 금지 이후 胡服을 착용했던 증거임은 분명하다. 胡人인 尉遲氏 등 공양자 등 2인이 胡服을 착용했음을 보여준 「長樂王夫人丘目陵亮夫人尉遲造像龕」은 太和 19년(495), 즉 胡服 금지 다음해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北魏 胡人門閥인 穆亮(丘目陵亮)과 부인 尉遲氏가 胡服 금지를 어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胡服과 漢服의 특징이 모두 보이는 陶俑이 46.7%(229개) 혹은 49.8%(244개)였다. 이는 胡服 금지 이후에도 胡服과 漢服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뜻한다. 陶俑에 보이는 胡服의 잔존과 胡服․漢服의 ‘융합’ 및 상호 영향이라는 특징을 통해 孝文帝의 胡服 금지가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陶俑의 胡服 착용은 각종 武士俑을 제외하면 朝廷이라는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사적 공간에 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楊機墓의 陶俑 4組 가운데 2組의 甲騎具裝俑과 손에 兵器를 쥐고 袍服과 鎧甲裝, 披裘裝을 입은 武士俑은 高鼻深目이며 胡服(鮮卑服)을 착용하였다. 반면 3組의 남녀 侍僕과 舞樂俑, 小冠을 쓴 남녀 侍僕俑, 小冠을 쓴 악대와 表演俑은 漢族服飾을 입은 漢人의 외모를 지녔다. 元邵墓의 陶俑은 墓主人이 牛車를 중심으로 出行할 때 侍衛․部曲․奴婢․伎樂 등 儀仗 장면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洛陽에 거주했던 일부 胡人과 漢人들은 일상생활에서 胡服을 착용하였고, 이는 자신의 직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꿔말하면 胡服 금지 조치를 朝廷의 벼슬살이라는 공적 영역과 사적인 일상생활로 나눈다면, 전자에서는 胡服 금지가 비교적 지켜졌겠지만, 후자는 사람들의 직업이나 기호에 따라 胡服․漢服․西域服을 착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영문
  • This essay is to give careful consideration to a problem of Sinicization in the later period of Beiwei. Chinese Students have been arguing that the nomads including Xianbi, Xiongnu, Jie, Qiang, Di and so forth, who immigrated from Mongol Plateau, Manchuria and Tibet Plateau, were adapted to Chinese civilization, or their culture, lifestyle and customs. I examined all the materials for nomads or pastoral men’s life and culture in the later period of Beiwei and found that they were not sinicized and maintained their own culture, lifestyle and customs, which they put on nomadic-style fur coats, hats, trousers, or riding breeches, ate mutton, other meats, and dairy goods. They went hunting, shooted an arrow with joy and military training, sang their nomadic-style songs, danced to the their original musics and enjoyed their nomad festivals. The wild geese courtiers, who had served in Luoyang court in autumn and winter and then had returned to their homes in pastoral region, slept in their ger or yurt, moving tent made of furs and wooden frames, in their pastoral birthplace in spring and summer. The nomad-oriented rulers in the later period of Beiwei were not actually sinicized facet. So I argues that the nomad people in Luoyang in the later period of Beiwei shoud not be entirely sinicized and maintain their own lifestyle and customs in part.
    My other essay is to examine the commonly accepted view of the prohibition on Hu-style(Xienbei-style) garments in 494, which banned Xienbei-based nomadic or pastoral people from wearing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I overturned conventional wisdom of the prohibition on Hu-style(Xienbei-style) garments in 494, which was not observed thoroughly. I set forth evidence that after the ban of the emperor Xiaowen in 494 Xienbei people wore their traditional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In this essay, I examine the dress and hat of the pottery figurines in excavated in tombs of Beiwei period in Beimang Mountain, which is located in north of Luoyang, the capital of Beiwei period. If the dresses and hats of the pottery figurines in excavated in tombs of Beiwei period was reflected to that of Louyang residents, ratio of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is 13.9%(or 10.8%), but that of Han(Chinese)-style garments and Western Region-style garments is 18.6% and 8.3% respectively. The mixture of Hu-style(Xienbei-style) and Han(Chinese)-style garments is 46.7%(or 49.8%). This showed that after the ban of the Xienbei-style garments,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were dressed both Xienbei-based nomadic or pastoral people and Chinese, Xienbei and Chinese costoms were mixed and influenced mutually. I don't deny the fact that there was Xienbei people to wear Chinese costoms but it was applied in their public lives and they wore Xienbei costoms in daily lives. I brought forward a reason to break partly the emperor Xiaowen's ban on weaing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that there was the decrease drop in temperature in period of Nanbeichao(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why Louyang residents wore the Hu-style(Xienbei-style) dresses and hats, which was better to protect them from the col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내용 및 결과를 요약하면 洛陽遷都와 ‘漢化政策’ 이후 胡人들의 생활을 살펴봐도 胡人들의 풍습이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년차 연수과제의 연구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孝文帝는 洛陽遷都 이후 洛陽으로 이주하기 싫어하는 胡人들을 달래기 위해 봄과 여름을 자신의 부족에서 보내고 가을과 겨울에 洛陽에서 생활하는 ‘雁臣’의 특권을 허용하였다. 기존에는 北魏前期 平城에 살았던 胡人들이 모두 洛陽에 이주했다고 보았지만(소위 代遷戶), 이런 雁臣의 특권을 가진 胡人들이 중국의 북변과 洛陽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면, 실제 代遷戶의 수는 적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遊牧생활을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漢化’에 전염될 가능성이 적었다. 이는 北魏末 발호했던 尒朱榮의 생활에서 확인된다. 또 孝文帝가 親征에서 돌아와 洛陽에 胡服을 입고 다니는 여성을 보고 任城王 元澄을 질책하였는데, 이때는 孝文帝가 죽던 해이며 胡服착용 금지조치가 실시된 지 5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는 사실상 胡服금지의 실패를 말해 준다. 北魏末 洛陽을 점령했던 梁의 陳慶之는 洛陽에서 胡服과 胡靴를 사용하던 모습을 목격했으며, 梁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陳慶之 부자는 이를 애용하였다. 이는 北魏가 망할 때까지 胡服과 胡靴가 적어도 洛陽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인데, 6세기 초 賈思勰이 지은 󰡔齊民要術󰡕에 胡人들의 음식들이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北魏後期에는 胡人들뿐만 아니라 일부 漢人들도 양고기와 양젖 등 胡人들의 음식을 먹었다. 예컨대 太和 18년(494) 南朝에서 망명했던 王肅은 몇 년이 지나 孝文帝가 주최한 궁중의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는 孝文帝와 다른 관료들처럼 양고기와 酪漿․酪粥같은 유목민들이 먹던 음식을 여전히 먹었다. 요컨대 胡人들의 의식주는 ‘漢化政策’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또 北魏後期의 사료를 보면 北魏의 皇帝들과 宗室 남성들이 사냥을 즐기는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다. 北魏前期부터 胡人들이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이는 자신들의 習俗을 계속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宣武帝의 후궁이자 孝明帝의 생모인 胡太后는 漢人이었는데도 활쏘기에 능했고 즐겼다. 이는 尙武的인 胡俗이 宮中에 만연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다음으로 2년차 연수과제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2년차 연수과제에서 北魏後期 수도인 洛陽에서 출토된 陶俑의 복식을 분석하였다. 胡服과 胡帽를 착용한 陶俑은 전체 陶俑의 12%(53개) 혹은 13.9%(68개)였고, 胡服과 非胡帽를 착용한 陶俑은 12.4%였다. 모자를 제외한다면 유목민의 복식인 胡服을 입은 도용은 전체의 1/4이었다. 그러나 조사 대상이 된 陶俑의 수가 적다는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계수치와 비중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494년 孝文帝의 胡服 금지 이후 胡服을 착용했던 증거임은 분명하다. 胡人인 尉遲氏 등 공양자 등 2인이 胡服을 착용했음을 보여준 「長樂王夫人丘目陵亮夫人尉遲造像龕」은 太和 19년(495), 즉 胡服 금지 다음해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北魏 胡人門閥인 穆亮(丘目陵亮)과 부인 尉遲氏가 胡服 금지를 어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胡服과 漢服의 특징이 모두 보이는 陶俑이 46.7%(229개) 혹은 49.8%(244개)였다. 이는 胡服 금지 이후에도 胡服과 漢服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뜻한다. 陶俑에 보이는 胡服의 잔존과 胡服․漢服의 ‘융합’ 및 상호 영향이라는 특징을 통해 孝文帝의 胡服 금지가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陶俑의 胡服 착용은 각종 武士俑을 제외하면 朝廷이라는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사적 공간에 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楊機墓의 陶俑 4組 가운데 2組의 甲騎具裝俑과 손에 兵器를 쥐고 袍服과 鎧甲裝, 披裘裝을 입은 武士俑은 高鼻深目이며 胡服(鮮卑服)을 착용하였다. 반면 3組의 남녀 侍僕과 舞樂俑, 小冠을 쓴 남녀 侍僕俑, 小冠을 쓴 악대와 表演俑은 漢族服飾을 입은 漢人의 외모를 지녔다. 元邵墓의 陶俑은 墓主人이 牛車를 중심으로 出行할 때 侍衛․部曲․奴婢․伎樂 등 儀仗 장면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洛陽에 거주했던 일부 胡人과 漢人들은 일상생활에서 胡服을 착용하였고, 이는 자신의 직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꿔말하면 胡服 금지 조치를 朝廷의 벼슬살이라는 공적 영역과 사적인 일상생활로 나눈다면, 전자에서는 胡服 금지가 비교적 지켜졌겠지만, 후자는 사람들의 직업이나 기호에 따라 胡服․漢服․西域服을 착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년차와 2년차 연수과제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漢化政策’ 이후에도 자신들의 생활과 습속을 유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자료의 한계 때문에 北魏後期 胡人들이 漢文化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胡俗만을 고집했는지, 양자를 모두 수용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2년차 연수과제의 연구결과를 보면 胡服과 胡帽를 착용한 陶俑은 陶俑의 12%(53개) 혹은 13.9%(68개)였다. 여기에 胡服과 非胡帽를 착용한 陶俑의 복식을 합하면 그 비중은 더욱 증가한다. 그리고 胡服과 漢服의 요소가 모두 보이는 陶俑도 존재한다. 따라서 北魏洛陽時代 복식은 胡服과 漢服이 공존했을 뿐만 아니라 胡服과 漢服이 융합한 복식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필자가 논증한 증거들은 동화론자들의 주장, 즉 孝文帝의 ‘漢化政策’ 이후 洛陽으로 이주한 胡人들은 "완전히 漢化되었다"는 ‘全般漢化’論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한다. 孝文帝의 선언적인 정책만을 과신하고 실제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고 ‘漢化’만을 주장하는 것은 동화론에 사로잡힌 태도이며, 이를 실제로 검증하는 것이 학문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北魏後期 胡人들이 ‘全般漢化’되지 않았으며, 北魏 皇室을 중심으로 胡語와 胡俗을 여전히 유지했던 계층이 적지 않았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는 현재 미국학계의 주류 연구방향인 新淸史, 즉 滿洲人이 漢族(중국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했다는 연구경향과 비슷하다. 北魏後期, 즉 北魏洛陽時代 胡族들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 습속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본 연구결과의 결론은 이민족의 중국지배 과정에서 이민족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본 연수과제의 내용을 비롯하여 契丹(遼)과 몽골(元), 淸 등의 사례를 모아 이민족의 중국지배와 동화 문제를 정리할 계획이다.
    본 연수과제의 결과물인 두 편의 논문은 2010년과 2011년에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에 게재되었다. 1년차 연수과제의 논문은 「北魏後期 洛陽거주 胡人들의 생활과 문화-孝文帝의 ‘漢化政策’의 재검토-」라는 제목으로 中國古中世史學會의 학술잡지인 中國古中世史硏究 24(2010. 08, pp.379-434)에 게재되었다. 2년차 연수과제의 논문은 「北魏後期 洛陽 출토 陶俑의 服飾 分析-胡服 착용 여부의 통계적 검토-」라는 제목으로 중앙아시아학회의 학술잡지인 중앙아시아연구 16(2011. 12, pp.29-52)에 게재되었다.
    본 연수자는 두 편의 논문을 바탕으로 北魏後期 孝文帝의 漢化政策이 제대로 실현되었는가를 검토하는 연구서를 집필할 계획이다. 그리고 두 편의 논문과 이를 포함한 연구서의 내용은 중국어나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 학술잡지에 기고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3-4년 후 집필할 연구서 역시 영어로 번역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본 연구 결과 가운데 北魏後期 洛陽北魏墓의 陶俑 복식을 분석한 논문은 미술사와 복식사 연구자들에게 당시 복식에 대한 정보와 통계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統攝적인 연구이며,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인용될 수 있는 연구성과라고 생각한다.
  • 색인어
  • 胡服 금지, 胡服 착용, 胡語 금지, 胡語 사용, 洛陽北魏墓, 陶俑의 胡服 착용, 사냥, 유목민의 방향감각, 胡俗의 의식주, 雁臣, 北魏洛陽時代, 孝文帝, 宣武帝, 孝明帝, 유목민의 음악, 洛陽伽藍記, 齊民要術, 王肅, 彭城王 元勰, ‘羊文化’, ‘魚文化’, 崔氏食經, 河陽牧場, 河西牧場, 打簇과 ‘相偸戱’, 樹梨普梨之曲, 敕勒舞, 敕勒歌, 廻波樂, 鑄像卜君, 爾朱榮(尒朱榮), 元睿墓, 郭定興墓(洛陽紗廠西路北魏HM555), 侯掌墓, 染華墓(90YCXM7), 偃師縣杏園村北魏墓(YDⅡM1101), 聯體磚廠二號墓, 元邵墓, 偃師前杜樓北魏石棺墓, 王溫墓, 楊機墓, 河南偃師南蔡莊北魏墓, 洛陽衡山路 北魏墓, 交領, 窄袖, 短褲, 左袵, 圓領], 褲褶服, 夾領小袖, 裲襠, 皮裘服, 西域服, 漢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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