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철학에게는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차이만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 신다윈주의에게는 동일성이야말로 존재의 근본이며 차이란 이러한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두 이론은 이처럼, 몇몇 주변적인 문제들에 있 ...
들뢰즈의 철학에게는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차이만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 신다윈주의에게는 동일성이야말로 존재의 근본이며 차이란 이러한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두 이론은 이처럼, 몇몇 주변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혹 그들의 몇몇 주장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이 발견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유사성은 모두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대립을 지울 수는 없다. 들뢰즈의 철학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외치는 반면, 신다윈주의는 ‘플라톤주의의 완성’을 가장 완고하게 주장하는 이론이라는 사실만을 보아도, 이들의 대립이 근본적이고 불가피한 성질의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들뢰즈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이 이론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신다윈주의에 대한 그의 이와 같은 우호적인 태도는 결코 일시적인 제스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10 년이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작품인 『차이와 반복』과 『천 개의 고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두 작품에서 공히, 신다윈주의에 대한 해석을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활용한다.
먼저, 우리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가 무엇인지를, 즉, 그가 어떻게 이 이론을 자신의 ‘차이의 존재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이론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과연 이러한 수용의 방식이 왜곡이나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정당한 것인지를 따져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수용은 심각한 오용(誤用)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철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들뢰즈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다윈주의와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천의 고원'에는 실제로 신다윈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많은 개념과 논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가능성의 파편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집대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 지식인들의 관심은, 다른 현대 철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며, 또한 철학계의 전문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시간도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주로 그의 철학의 문화·예술철학적 측면이나 정치·사회 철학적 측면이 이러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아직까지도 우리가 강조한 측면, 즉, 과학과의 경쟁을 통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이 되고자 하는, 그의 철학의 자연철학적·존재론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부족해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의 현대 과학 이론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것이라는 사정이, 이러한 부진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번 연구를 수행하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난국으로부터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기존의 연구들도 매우 드물게 밖에는 만나지 못했다. 더구나,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이들 소수의 연구들 중에서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연구들만큼이나 신중하지 못한 허황된 내용을 말하는 연구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번 연구는, 기존 연구들이 주장해온 것과는 다른 주장을 제기하거나, 아예 반대되는 주장을 제기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주장에 비해, 그와 반대되는 새로운 주장이란 처음에는 언제나 ‘소수적 지위’를 갖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주장을 다소 조심스럽게 제시하려 하였다. 하지만 밝은 눈과 넓은 마음을 가진 연구자들에게는 우리가 제시하는 주장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고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새로운 주장 역시,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시정하고자 하는 기존의 잘못된 주장만큼이나 결점이 많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주장만 있을 때와는 달리, 서로 다른 여러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날 경쟁이, 어느 주장이 더 옳은지를 가려내줄 수 있게 하거나 혹은 그들 모두보다 더 나은 제 3의 주장을 향해 보다 가까이 접근해갈 수 있게 하는 건전한 시험대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연구가 이와 같은 건전한 시험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