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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생명철학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인문사회)
연구과제번호 2011-358-A00043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3 년 (2011년 07월 01일 ~ 2014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조현수
연구수행기관 강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적은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틀림없이 현대철학사상의 형성과 전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담론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철학은 그 완전한 진면목이 무엇인지 확정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되고 변화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연구들이 그의 철학의 깊이와 잠재력을 새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해석해내고 있지만, 이들 해석의 풍부함은 그의 철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통일된 이해를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 사이의 커다란 불일치를 계속 심화시켜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전(全) 철학적 작업을 반성하는 기회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들은 결국 ‘생명론’이며, 이는 닫힌 길을 열어 생명에 새로운 출구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또한 ‘자연적인 것과 인위(인공)적인 것의 차이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새로운 ‘자연철학’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생명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의 모든 철학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를 이해하는 것이 곧 그의 철학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 적어도 필요불가결한 열쇠를 -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만약 그의 철학에 대해 주어지는 때론 서로 이질적이기까지 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서로 균형 있게 조화시키고 통합시켜줄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을 얻으려 한다면, 그러한 기반은 생명에 대한 그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본 연구는 그러므로 그의 생명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직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그의 철학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통일적 통찰을 제시하는 데 기여하려 한다.
    한 편, 들뢰즈 사후, 생명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그의 생시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근본적이고 획기적이라고 부를만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이러한 변화는 들뢰즈가 의식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생명에 대한 사고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명철학은 과연 과학의 이러한 변화를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과 일치하도록 수용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이처럼 달라져가는 사고의 지형 속에서 그의 생명철학이 어떻게 평가·수용될 수 있으며 또한 (만약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면) 어떻게 새롭게 변모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탐구해볼 것이다.
  • 기대효과
  • 데카르트로부터 베르그손에 이르는 전통적 프랑스 철학의 특징으로는 흔히 그 과학철학적인 면모가 지적된다. 그 후 20세기 중반에서부터 이른 바 3H(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과 그 뒤를 이은 구조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이른 바 인문주의적 철학이 사상계의 전반을 주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까바이에스, 깡길렘, 바슐라르 등의 주요 철학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던 이러한 과학철학적 전통은 어느 듯 소수의 흐름이 되고 만 듯 보인다. 혹은, 적어도 우리 학계의 프랑스 철학 수용에 있어서는 이러한 과학철학적 전통에 대한 연구가 틀림없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연구경향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연구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의 철학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철학이나 혹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주는 예술철학으로 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점점 더 소수의 흐름으로 뒤처져 오던 저러한 과학철학적 전통을 다시 무대의 전면으로 되살리는 철학이다. 철학은 그의 손에서 다시,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을 생각하는 우주론적 사유로 되돌아오려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점점 잊혀져 가는 프랑스 과학철학 전통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그것에 대한 연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의 논쟁적인 방법이 정말로 계속해서 새로운 논쟁들을 불러오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은 단순히 과학철학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저 인문주의적 철학의 시대가 거둬온 풍요로운 결실들과 하나로 융합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자연의 존재가 이제, 서로로부터의 깊은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긴밀한 연관 속으로 재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철학의 가장 본래적인 과제가 우주에서의 인간의 존재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데 있는 것이라면, 들뢰즈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철학의 이러한 본래적인 과제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을 비롯한 유럽대륙의 현대 철학과 영미(英美)의 현대 철학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몰이해의 골이 깊게 패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철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조차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명철학에 대한 연구는 현대 영미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주제의 하나이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대한 가장 훌륭한 연구서 중의 하나가 - K.A. Pearson의 Germinal Life - 영국 철학자의 손에 의해 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철학이라는 공통의 주제는 이 둘이 서로의 실력과 공과를 겨루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험의 무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시험의 기회에 도전할 것이며, 이로써 현대 철학의 양 진영 간의 상호 이해와 소통에 이바지할 것이다.
  • 연구요약
  • 들뢰즈는 '생명의 과학'과는 다른 '생명의 철학'이 성립할 수 있는 요건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이 요건의 핵심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잠재성의 현실화운동이야말로 생명의 존재방식이고 작용방식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현실화운동은 저 잠재성의 자기분화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요건들을 ‘생명의 철학’을 위한 요건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생명의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나아가 과학 일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 무엇이 생물학으로 하여금 물리학이나 화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학(science)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 그의 이해를 드러내고 있는 진술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보기에, ‘생명의 과학’과는 다른 ‘생명의 철학’이 가능하고 필요하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잠재성과 그것의 작용방식이 자연 속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이러한 잠재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 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철학사가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다시 말해, 철학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철학사가 무엇을 해왔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처럼, 과학이 무엇인지의 문제도 과학이 그것의 역사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생각해왔는가를 반성해봄으로써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과학의 역사를 통해서 적어도 주류적인 흐름을 형성해온 과학은,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과학의 세계이해에 있어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과학은, 결코 그가 말하는 의미의 잠재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 점이 바로 과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면서 또한 극복되어야 할 그 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신)다윈주의는 이러한 잠재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려 하며, 바로 이 점이 이 이론을 ‘생명에 대한 과학(생명의 과학)’이 되도록, 다시 말해, 과학 고유의 세계이해 방식을 물질을 넘어 생명체의 존재에까지 보편적으로 확대시키는 이론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지만, 또한 바로 이 점이 오류이기 때문에 (잠재성을 복권시키는) ‘생명의 철학’이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에게서는 각자 서로에 대해 뚜렷이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철학과 과학이, 동일한 대상(생명)에 대한 참된 인식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다. (물론 ‘동일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이 둘 사이에는 서로 유익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많은, 협력과 공생의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이 과학과는 다른 독립적인 존립의 이유를 얻으려 하는 한 - 또한 과학 역시 그렇게 하려 하는 한 -, 이러한 협력과 공생의 모습이 더 깊이 숨어 있는 경쟁과 대립의 관계를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이로부터 본 연구는 자신의 연구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로, 또 어떤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잠재성이란 무엇이기에, 또 과학이란 무엇이기에, 과학은 그토록 잠재성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가? 잠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이 생각하는 세계의 존재방식(혹은 작용방식)은 무엇인가? 세계를 ‘잠재성의 현실화’란 논리로 볼 때와 과학이 상정하는 논리로 볼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경쟁하는 이 두 논리의 우열이나 장단점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뤼이에르(R. Ruyer)는 모든 철학자는 잠재적인 것(이념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두 패로 나뉜다고 말했지만, 들뢰즈에게 이 차이는 단지 그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과학에 대한 철학의 독립적인 생존가능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본 연구가 사용할 방법은 그러므로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그것이 대립하는 ‘생명의 과학’과 ‘잠재성’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서로 논박하게 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옹호하도록 만듦으로써. 그것이 지닌 의미와 가치, 또한 그 정당성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한글키워드
  • 비유기적 생명,생명,횡단적 소통,존재론,잠재성의 현실화운동,잠재성(잠재적인 것),일관성의 평면. 이것임.,윤리학,신다윈주의,생명의 철학,생명의 과학,베르그손주의와 신다윈주의의 새로운 종합,'과학 없는 윤리'와 '윤리 없는 과학',내재성의 평면,들뢰즈의 생명철학,베르그손주의
  • 영문키워드
  • 'Science without Ethics' and 'Ethics without Science,Inorganic Life. Ontology,Transversal Communication,The Bio-philosophical thinking of Deleuze,Science of Life,Plan of Immanence,Plan of Consistancy,Philosophy of Life,New Synthese of Bergsonism and Neo-Darwinism,Neo-Darwinism,Life,Virtuality(or Virtual),Haecceity,Actualisation of a Virtual,Ethics,Bergson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들뢰즈의 철학에게는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차이만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 신다윈주의에게는 동일성이야말로 존재의 근본이며 차이란 이러한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두 이론은 이처럼, 몇몇 주변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혹 그들의 몇몇 주장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이 발견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유사성은 모두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대립을 지울 수는 없다. 들뢰즈의 철학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외치는 반면, 신다윈주의는 ‘플라톤주의의 완성’을 가장 완고하게 주장하는 이론이라는 사실만을 보아도, 이들의 대립이 근본적이고 불가피한 성질의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들뢰즈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이 이론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신다윈주의에 대한 그의 이와 같은 우호적인 태도는 결코 일시적인 제스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10 년이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작품인 『차이와 반복』과 『천 개의 고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두 작품에서 공히, 신다윈주의에 대한 해석을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활용한다.
    먼저, 우리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가 무엇인지를, 즉, 그가 어떻게 이 이론을 자신의 ‘차이의 존재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이론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과연 이러한 수용의 방식이 왜곡이나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정당한 것인지를 따져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수용은 심각한 오용(誤用)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철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들뢰즈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다윈주의와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천의 고원'에는 실제로 신다윈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많은 개념과 논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가능성의 파편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집대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 영문
  • Deleuze's ontology of difference poses a perfect identity between Being and Difference, which enables it to say that everything in the world exists as being in the movement of differenciation. So, according to this ontology, there is a permanent tendency toward change in the very internal nature of living being and this internal nature is the reason why it evolves. But neo-darwinism contradicts this view by insisting that the internal nature of living being does not consist in a tendency toward change, but in a invariant self-replication. Evolution happens, according to this theory, because an external force comes to perturb the normal functioning of this self-replication. That is to say, if a living being evolves, it is not by it's own internal nature, but it is rather forced to evolve, despite it's own internal tendency toward invariant self-replication. Therefore, it seems that there is an non-conciliable opposition between Deleuze's ontology of difference and neo-darwinism. But, surprisingly, Deleuze tries to get from this opposing theory an argument capable of demonstrating his own idea of internal tendency of living being toward change. This argument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a movement of decoding is always already immanent to the code. And this conclusion leaps to a highlighting proposition of Deleuzian philosophy: "an absolute deterritorialisation is always already immanent to any relative deterritorialisaion and, by consequent, to any territory and any stratum. [...] A permanent mutual immanence of strata and plan of consistance." Here, we can see that the very idea of Plan of Consistance(Body without organs) have, as it's source, the argument which Deleuze wish to derive from the neo-darwinism in order to appropriate it in favour of his own idea of the evolution. In so far as we know, Deleuze proposes no other argument which can play the role of the source from which the very idea of Plan of Consistance would be originated. Even if there is such an other argument, this 'argument from ned-darwinism' would still remain one of the most important source. So we are permitted to believe that Deleuze's rencontre with the neo-darwinism is far from being an transitory episode, never indispensable for the construction of his philosophy, but an crucial moment which lays the very foundation stone supporting the whole weight of the magnificent theoretical architecture of Deleuze's philosophy. If this foundation stone is shaken, this magnificent architecture will collapse immediately, like a castle in the air. This paper knocks on this foundation stone in order to see if it is really solid. How can Deleuze make his most dangerous enemy(neo-darwinism) his best friend ?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들뢰즈는 존재와 차이의 완전한 일치를 주장한다. 이러한 ‘차이의 존재론’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새로운 차이를 생산해내는 ‘차이와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차이의 존재론은 생명체의 내적 본성을 ‘변화에 대한 항상적인 지향성’에서 찾으며, 따라서 진화를 이러한 내적 본성의 발현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신다윈주의에게 생명체의 내적 본성이란 오히려 ‘불변적인 자기 복제’에 있으며 따라서 진화란 이러한 내적 본성이 실현되는 것을 외부로부터 방해하는 외적 요인의 교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신다윈주의란 그러므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외치는 차이의 존재론에 대해 ‘플라톤주의의 승리’를 주장하며 맞서는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들뢰즈는 이러한 신다윈주의로부터 자신의 차이의 존재론의 정당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논증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증이 도달하는 결론은, 유전 정보(코드) 속에는 언제나 탈코드화의 운동이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둘은 언제나 불가분의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론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도약한다. “절대적인 탈영토화 운동이 상대적인 탈영토화 운동에 (따라서 영토나 지층에) 언제나 내재하고 있다. [...] 지층과 ‘일관성의 구도’ 사이의 항상적인 상호 내재성.” ‘일관성의 구도(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핵심 사상은 이처럼 그가 신다윈주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논증의 결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들뢰즈가 이러한 출발점을 세우기 위해 이것 이외의 다른 논증을 제시하는 경우는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신다윈주의로부터의 논증’이 가장 중요한 논증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다윈주의와의 만남은 들뢰즈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없어도 좋을 일과성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가 쌓아올린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의 전 중량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놓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주춧돌이 흔들리게 되면 모든 것은 공중누각처럼 일순 무너져 내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 들뢰즈는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이 글은 그의 사상을 지탱하기 위해 놓여진 이 주춧돌이 과연 튼튼한 것인지를 두드려 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이 낡은 주춧돌을 대신할 새로운 주춧돌을 놓을 필요성을 제안하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들뢰즈의 철학에게는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차이만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 신다윈주의에게는 동일성이야말로 존재의 근본이며 차이란 이러한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두 이론은 이처럼, 몇몇 주변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혹 그들의 몇몇 주장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이 발견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유사성은 모두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대립을 지울 수는 없다. 들뢰즈의 철학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외치는 반면, 신다윈주의는 ‘플라톤주의의 완성’을 가장 완고하게 주장하는 이론이라는 사실만을 보아도, 이들의 대립이 근본적이고 불가피한 성질의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들뢰즈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이 이론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신다윈주의에 대한 그의 이와 같은 우호적인 태도는 결코 일시적인 제스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10 년이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작품인 『차이와 반복』과 『천 개의 고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두 작품에서 공히, 신다윈주의에 대한 해석을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활용한다.
    먼저, 우리는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가 무엇인지를, 즉, 그가 어떻게 이 이론을 자신의 ‘차이의 존재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이론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과연 이러한 수용의 방식이 왜곡이나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정당한 것인지를 따져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신다윈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수용은 심각한 오용(誤用)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철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들뢰즈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다윈주의와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천의 고원'에는 실제로 신다윈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많은 개념과 논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가능성의 파편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집대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 지식인들의 관심은, 다른 현대 철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며, 또한 철학계의 전문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시간도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주로 그의 철학의 문화·예술철학적 측면이나 정치·사회 철학적 측면이 이러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아직까지도 우리가 강조한 측면, 즉, 과학과의 경쟁을 통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이 되고자 하는, 그의 철학의 자연철학적·존재론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부족해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의 현대 과학 이론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것이라는 사정이, 이러한 부진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번 연구를 수행하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난국으로부터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기존의 연구들도 매우 드물게 밖에는 만나지 못했다. 더구나,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이들 소수의 연구들 중에서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연구들만큼이나 신중하지 못한 허황된 내용을 말하는 연구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번 연구는, 기존 연구들이 주장해온 것과는 다른 주장을 제기하거나, 아예 반대되는 주장을 제기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주장에 비해, 그와 반대되는 새로운 주장이란 처음에는 언제나 ‘소수적 지위’를 갖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주장을 다소 조심스럽게 제시하려 하였다. 하지만 밝은 눈과 넓은 마음을 가진 연구자들에게는 우리가 제시하는 주장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고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새로운 주장 역시,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시정하고자 하는 기존의 잘못된 주장만큼이나 결점이 많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주장만 있을 때와는 달리, 서로 다른 여러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날 경쟁이, 어느 주장이 더 옳은지를 가려내줄 수 있게 하거나 혹은 그들 모두보다 더 나은 제 3의 주장을 향해 보다 가까이 접근해갈 수 있게 하는 건전한 시험대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연구가 이와 같은 건전한 시험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색인어
  • 들뢰즈의 생명철학, 차이의 존재론, 신다윈주의, 동일성, 차이. 코드, 탈코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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