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이광수에게 불교란 무엇이었는가,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 출발한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어째서 종국에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치달아가는 궤적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전회에 1937년 중일전 ...
본 연구는 이광수에게 불교란 무엇이었는가,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 출발한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어째서 종국에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치달아가는 궤적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전회에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대동아전쟁에 이르는 정치적 현실이라는 외적 조건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전회를 가능케 했던 사유의 근본 구조와 심리적 기반이라는 내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되기 시작한 이래 전향과 전향 이후 적극적인 친일시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불교적 사유는 복잡다단한 굴곡을 보여주고 있는 만큼, 그러한 궤적 전반을 관통하는 사유의 근본 구조와 심리적 기반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는 그러한 전회의 논리와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향에서 적극적인 친일에 이르는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보이는 전회의 성격에 관한 논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파시즘적 무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아직까지 연구 관점 간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내재한 보편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느냐 혹은 전체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느냐 하는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자를 강조하느냐 혹은 후자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는 심리적 저항의 가능성이 상정되기도 하고 그러한 편력 일체가 파시즘적 전체주의와 등가의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향에서 적극적인 친일에 이르는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서 종교로서의 불교가 갖는 보편주의적 성격만을 강조할 수 없듯, 그의 불교적 사유 전반을 곧바로 친일의 논리와 연관짓는 것 또한 일면적인 시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이광수가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불교적 사유는 이러한 정치적 논리와는 무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향 이후 적극적인 친일협력 시기에서조차도 그의 불교적 사유는 보편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일정한 동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향 이후 그의 정치적 신념의 근저에는 일찍이 그가 불교에 경사된 이래 마음에 품었던 ‘淨佛國土․成就衆生’의 실현이라는 법화 이념의 연속성이 발견되는 바, 종교적 보편주의에 근간을 두었던 그의 불교적 사유가 파시즘적 전체주의와 만나는 지점에 대한 논의는 좀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연구에서는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된 이래 전향과 적극적인 친일시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불교적 사유에 보이는 구조적 연속성에 주목하여 그 근저를 관통하는 사유의 근본 구조를 찾아내는 한편, 보편주의에 근거를 두었던 그의 불교적 사유가 어느 지점에서 전체주의와 공명하고 혹은 균열을 보이는지 그 심리적 기반을 고찰함으로써, 전향 이후 그의 불교적 사유가 제국주의의 지지로 치닫게 되는 전회의 논리와 성격을 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이로써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 안에 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간과되어 왔던 보편주의와 전체주의 간의 길항 국면을 논증하고, 이에 대한 반성적 접근을 통하여 보편의 도구화와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보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연구요약
본 연구는 다음의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우선 1단계 연구에서는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되어가던 무렵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근저를 이룬 사상적 근간을 고찰한다. 이광수가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26년 6월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의 재 ...
본 연구는 다음의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우선 1단계 연구에서는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되어가던 무렵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근저를 이룬 사상적 근간을 고찰한다. 이광수가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26년 6월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의 재발에서 1929년 5월 신장 결핵으로 대수술을 받기까지 4년여 간 병상에서 거듭 사경을 헤매던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자기 구원의 모색에서 출발한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인류의 구제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그의 근본적인 인생관의 재확인으로 귀결되고 있는데, 이러한 이광수의 인생관은 유년시절 동학에서 얻은 감화 및 중학시절 톨스토이 기독사상의 영향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편 1934년 민족사업의 실패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에 급속하게 경사되어 가던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이운허․이청담 등 조선 선불교 선승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법화경]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구체적인 틀을 갖추어가는데, 이 무렵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점차 민족이라는 개념과 결합하면서 민족 지향적인 중생구제사상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1단계 연구에서는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되기 시작하던 무렵 그의 불교적 사유에 보이는 동학 및 톨스토이의 기독사상의 영향을 살피는 한편, 이운허․이청담으로 이어지는 조선 선불교의 영향 속에서 그의 불교적 사유가 구체적인 틀을 갖추게 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근본적으로 민족 지향적인 중생구제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었음을 밝힐 것이다. 다음의 2단계 연구에서는 전향에서 적극적인 친일에 이르는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보이는 변모와 전회의 논리를 규명한다. 전향에서 적극적인 친일에 이르는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그가 1940년 8월 동우회 2심 上告 중에 皇道學會(1940.12.25 창립)에 관여하며 적극적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시기를 전후하여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일본의 國體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와 확고히 결합한 전형적인 황도불교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근저에는 전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불국토․성취중생’의 실현이라는 법화의 이상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바, 이는 이광수가 불교에 경사되기 시작한 이래 전향과 적극적인 친일시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불교적 사유를 관통하는 일정한 구조적 연속성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더욱이 황도학회에 관여하며 적극적인 친일에 나섰던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는 쇼와 말기 신체제의 불교 동원책 차원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쇼토쿠 태자와 법화경 절대주의자 니치렌 상인에 관한 언급이 자주 발견되는 만큼, 이 무렵 전시체제하 종교적 내셔널리즘의 일익을 담당했던 황도불교의 논리가 그의 불교적 사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아울러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2단계 연구에서는 전회 이전과 전회 이후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를 관통하는 구조적 연속성에 주목하여 보편주의에 근간했던 그의 불교적 사유가 전체주의에 기반한 파시즘적 사유와 결합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아울러 여기에 일본정신과 불법을 결합한 황도불교의 논리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함께 짚어봄으로써, 전향에서 적극적인 친일에 이르는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보이는 전회의 논리와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단계 연구에서는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내재한 보편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논리를 단숨에 상대화할 수 있는 요소와 아울러 절대 평등한 우주 자체에 근거를 둔 보편윤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동시에 내재해 있다. 물론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한때 보편의 이름으로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보편의 도구화와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보편의 힘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 3단계 연구에서는 평소 이광수가 즐겨 읽었던 대승경전의 기본 교의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애초에 보편주의에 근거를 두었던 그의 불교적 사유가 어느 지점에서 전체주의와 공명하고 균열을 보여주며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지 그 길항관계에 주목하여 그의 불교적 사유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보편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로써 보편의 도구화와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보편의 힘을 다시금 확인하고, 구체적인 삶의 지평에서 보편윤리의 실현을 위한 사유의 단서를 열어가는 것이 이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가능성이다.
본 연구는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갖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천황의 赤子라는 특권적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香山光郞이라는 존재는 자연과 인간계를 초월한 절대의 자각을 강조하는 불교의 보편주의와는 명백히 상충하는 것처럼 보 ...
본 연구는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갖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천황의 赤子라는 특권적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香山光郞이라는 존재는 자연과 인간계를 초월한 절대의 자각을 강조하는 불교의 보편주의와는 명백히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에 대한 논의는 친일협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진리의 修辭일 뿐이라는 입장과 반대로 절대보편의 힘에 의지하여 지상의 논리를 초극하고자 하는 윤리적 신앙이라는 입장으로 나뉘어 연구 관점 간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이광수가 이 양자의 정체성을 안이하게 결합하거나 분리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불법에 의한 합리화도 불법을 통한 초월도 아니라면, 천황의 적자를 자처한 이광수가 곧 불도를 닦는 행자로서의 이광수이기도 하다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했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본 연구는 천황의 赤子로서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 안에 再記入함으로써 이 양자 간의 대립을 止揚해간 사유의 궤적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장편 원효대사(1942.3-10)와 「三京印象記」(1943.1) 두 편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1942년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원효대사는 前作 세조대왕(1940) 이후 2년만에 조선어로 집필된 장편이다. 원효대사는 화랑의 풍류와 충군애국 정신을 대변하는 국가주의적 인물인 원효를 내세워 전시동원에 협력한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는 당국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동원한 표면적인 서사에 의존한 해석일 뿐이다. 원효의 종교적 실천이 호국불교적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의 권위란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에 의거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상의 국가를 승인하고 그 통치자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당대 王法 우위의 皇道佛敎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 한편 ‘파계’에 대한 자의식으로 괴로워하던 원효가 청정한 사문의식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대승보살행의 실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파계’에 대한 번뇌가 곧 淸淨業報를 고집하는 자기에 대한 집착임을 깨친 데서 비롯된다. 이후 원효의 종교적 실천은 한 마디로 청정업보에 집착하지 않고 널리 중생의 부름에 응하는 보살의 실천행이라 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권위란 결국 진리의 보편성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 그것은 그 자신 천황의 적자를 자처하는 것은 오직 중생의 부름에 응하는 보살의 방편일 뿐이라는 신념과 더불어 이광수가 자신의 삶을 진리의 도정 위에 위치지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월 분가쿠카이(文學界)에 발표된 「삼경인상기」는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여하면서 얻은 ‘감격’과 ‘체험’을 보고서의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이광수는 대동아문학자대회 석상에서 일본인의 목표는 세계 인류의 구제에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오직 天皇뿐이므로, 천황을 翼贊해드리면서 죽는 것이야말로 대동아정신의 기본이라고 발언하여 청중의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삼경인상기」에는 이러한 공공연한 천황 예찬과는 다른 목소리가 혼재하여 있는데, 특히 고대 일본의 수도 나라(奈良)을 견학한 감상을 적은 후반부가 그러하다. 「삼경인상기」에 그려진 고대 나라의 모습에서는 지상의 국경을 넘어 세상에 불교적 진리를 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돕는 평화로운 진리 공동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戰時期 일본에서 쇼토쿠 태자의 불교가 국가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속적인 수단으로 위치지어져 전쟁 지지의 논리로 동원되었다면, 「삼경인상기」에서 그것은 조선의 先人들이 쇼토쿠 태자에게 전해준 佛法이라는 내러티브를 매개로 불교적 진리의 闡明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까닭이다. 지상의 모든 권위란 결국 진리의 보편성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 그것이 이번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모든 민족이 진리 속에서 하나되는 진리 공동체의 도래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문
This study is primarily to understand the paradox of Lee-Kwangsoo's buddhistic thinking in collaboration with Japan period. The being of Hyangsankwangrang(香山光郞) who acclaimed that he is the baby of the emperor of Japan seems to contradict the buddhis ...
This study is primarily to understand the paradox of Lee-Kwangsoo's buddhistic thinking in collaboration with Japan period. The being of Hyangsankwangrang(香山光郞) who acclaimed that he is the baby of the emperor of Japan seems to contradict the buddhistic universalism which emphasizes absolute awareness beyond nature and human world. Moreover studies of this period of Lee-Kwangsoo's buddhism have no reconciliation between the perspective that Lee-Kwangsoo's buddhism was just rhetoric supporting logic of collaboration with Japan, and the perspective that Lee-Kwangsoo's buddhism was ethical belief trying to surpass logic of earth, depending absolute truth. This study has a point of view that Lee-Kwangsoo did not combine nor separate the two perspectives easily. This study invetigates two texts <Great Master Wonhyo>, <Three cities impression> which show us his trace of thoughts rejecting two opposite perspectives. Two texts have voices of writer Lee-Kwangsoo who did not exclude identity as baby of Japan emperor and reentered it into universality of buddhistic truth. <Great Master Wonhyo> is novel published serially on <Daily News(每日新報)> from March 1th to October 31th in 1942. This novel has been interpreted as cooperating to wartime mobilization by character Wonhyo representative of patriotic Hwarang(花郞). But this interpretation is based on what is presented on the surface to satisfy the authorities. Wonhyo's religious practices seems to be buddhism for nation. But it emphasizes justification of earthly authority on the universality of buddhistic truth. This has some different points from logic of Japanese buddhism which approves earthly nation and demand absolute obedience to ruler. Wonhyo is described as character who found his preoccupation with purity of karma after violating buddhist commands. The recognization makes him practice Bodhisattva doings for all living beings. The conviction that earthly authority finally kneel down to the universality of buddhistic truth and the belief that considering Lee-Kwangsoo himself as baby of Japan is means of Bodhisattva doings for all living beings seem to make Lee-Kwangsoo's life be toward truth. <Three cities impression> published on <Literature world(文學界)> in January 1943 is writing reporting impression and experience while participating the 1st Mass Meeting of Writers in Great Asia. This writing has different voice from apparent praise for Japanese emperor. Especially at the latter part it describes impression experiencing Nara, old capital of Japan where all people help each other to practice buddhistic truth beyond borders. The buddhism of Shotoku was taken as means to support purpose of nation at wartime. But it is reinterpreted from the point of buddhistic truth in "Three cities impression". The conviction that all earthly authorities finally kneel down to the universality of buddhistic truth was Lee-Kwangsoo's wish for coming of truth community where all nations in emperor and colony be the one.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본 연구는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갖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천황의 赤子라는 특권적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香山光郞이라는 존재는 자연과 인간계를 초월한 절대의 자각을 강조하는 불교의 보편주의와는 명백히 상충하는 것처럼 보 ...
본 연구는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갖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천황의 赤子라는 특권적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香山光郞이라는 존재는 자연과 인간계를 초월한 절대의 자각을 강조하는 불교의 보편주의와는 명백히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에 대한 논의는 친일협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진리의 修辭일 뿐이라는 입장과 반대로 절대보편의 힘에 의지하여 지상의 논리를 초극하고자 하는 윤리적 신앙이라는 입장으로 나뉘어 연구 관점 간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이광수가 이 양자의 정체성을 안이하게 결합하거나 분리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불법에 의한 합리화도 불법을 통한 초월도 아니라면, 천황의 적자를 자처한 이광수가 곧 불도를 닦는 행자로서의 이광수이기도 하다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했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본 연구는 천황의 赤子로서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 안에 再記入함으로써 이 양자 간의 대립을 止揚해간 사유의 궤적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장편 원효대사(1942.3-10)와 「三京印象記」(1943.1) 두 편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첫째,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논의의 활성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대한 논의는 크게 친일협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진리의 修辭일 뿐이라는 입장과 반대로 절대보편의 힘에 의지하여 ...
첫째,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논의의 활성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대한 논의는 크게 친일협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진리의 修辭일 뿐이라는 입장과 반대로 절대보편의 힘에 의지하여 지상의 논리를 초극하고자 하는 윤리적 信仰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이광수가 이 양자의 정체성을 안이하게 결합하거나 분리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본 연구는 이러한 연구 관점 간의 간극을 조정하여 천황의 적자로서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 안에 再記入함으로서 이 양자 간의 대립을 止揚해간 사유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갖는 역설의 논리와 그 의미를 내적으로 규명하는 방법론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본 연구는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논의의 활성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친일협력 시기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논의에 기반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인식론적 지평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천황의 적자로서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 안에 再記入함으로서 이 양자 간의 대립을 止揚해간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특히 佛法과 王法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지상의 모든 권위란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상의 국가를 승인하고 그 통치자인 천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당대 王法 우위의 皇道佛敎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전개하고 있는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을 한국 근대문학의 장으로 적극 끌어들이고 있는 본 연구는 한국 근대문학의 인식론적 지평 확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에 내재한 보편의 힘을 구체적인 삶의 지평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현실 인식과 실천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광수의 불교적 사유가 지상의 모든 권위란 궁극적으로 불교적 진리의 보편성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같은 현실의 논리를 단숨에 상대화할 수 있는 요소와 아울러 절대 평등한 우주 자체에 근거를 둔 보편존재 혹은 진리 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나’와 ‘나 아닌 것’의 이분법에 근거한 전체주의적 사고와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보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본 연구는 나, 지역, 민족, 국가, 인종의 벽을 넘어서 인류 사회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방향성에 대해 성찰하고 이를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