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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像의 두(修己的-治人的) 系譜 탄생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Lineages of Two images(Sugi and Chiin) in Toegye's Portrait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1019328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최재목
연구수행기관 영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현존하거나 최근 발견한 퇴계의 4점 초상화, 즉 최근 발견된 ‘조선시대 1점’과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직후 1점,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원권 지폐 속의 표준 영정인) 현대 1점을 통해서, 修己와 治人이라는 두 가지의 ‘退溪’像을, <治人-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內聖的 퇴계상=대내용>라는 관점에서 그 계보와 탄생의 이유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퇴계를 두 가지 타입의 ‘偉人’ - 유교적 의미에서는 성현 - 으로 존숭해 온 데에는 각기 다른 시대적 요청이 존재했었다. 다시 말하면 퇴계의 초상화에는 각기 그 시대가 요구했거나 상상했던 이념들, 이미지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근・현대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국민 대중 교화・교육용으로서, 새로운 인물 만들기의 일환으로서, 퇴계상의 정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퇴계의 초상화에는 퇴계의 이미지(=사상・이념・메시지)를 ‘창출하는 쪽=발신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수신자’ 사이에 위치하여 양자를 연결하는 매개(마치 사찰 외벽의 탱화와 같이)로서 두드러지게 ‘미디어(매체)’의 위치를 갖는다. 퇴계 초상화의 이미지에는 발신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국가나 사회가 일반대중을 향한 즉각적으로 목전에 보여주고, 내면에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는 바로 국민들의 전범이 될 ‘모범적・이상적 인간상’의 제시이다. 그런 비범한 傳記를 가진 ‘偉人’像 제시를 통해 현실적 대중들이 불안・부족・곤궁・궁핍의 현실을 감내하고 초월하여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라는, 근대적 超凡入聖의 슬로건으로서, 새로운 국민만들기의 표상으로서, 敎育立國의 지표로서의 강한 독촉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보통 유교적 관점에서 ‘聖人’이라 하면 두 가지 타입을 들 수 있다. 하나는 ‘禮(문화-제도)의 製作者’이고, 다른 하나는 ‘禮의 體得者’가 그것이다. 물론 성인 개념은 ‘선택된 소수자(특수적)’에서 ‘학문・덕행의 체득・실천으로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보편적)’으로 바뀌긴 한다. 그러나 그 판단의 기준은 ‘天人合一(合德)’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경지’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聖雄 李舜臣, 聖王 世宗大王 정도이다. 여기에 한 사람을 필자에게 더 추가하라면 聖儒 李退溪(滉. 1501-1570)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퇴계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동양 전통적 ‘성인’ 혹은 ‘성자’에 상당하는 위인으로서의 모습이 인정되어 왔다. 근대 이후에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기획된 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퇴계는『퇴계선생언행록』에서 보듯이 이미 생존 당시부터 성자적인 흔적을 갖고 있다. 보통 聖者를「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 하듯이, 인간이면서 ‘인간 그 이상’=‘성스러움’에 도달한 모습 말이다. 퇴계가 일찍부터 성인 내지 聖者로서 간주된 데에는 살아있는 인간(凡)이면서 인격적, 내면적 비범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超凡入聖’에 관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먼저, <은폐된 ‘퇴계상’ 다시 읽기>를 통해서 그동안 은폐되어 온 퇴계상을 다시 복원해보면서 <治人-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內聖的 퇴계상=대내용>의 사상적 근거를 논의하고, 이어서 종래의 초상화를 통해서 <두 가지 ‘退溪’像의 탄생과 흐름>을 계보론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아울러, 이 논문에서 사용될 자료는 『퇴계전집』및『퇴계선생언행록』에 나타난 퇴계의 행적, 그리고 근현대기에 만들어진 퇴계초상화가 중심이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첫째, 그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퇴계의 이미지를 보다 분명히 복원해냄으로써 퇴계연구의 폭을 넓힐 것이다.
    둘째,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 자생해 왔던 퇴계 이해와 연구의 숨은 틀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아가서 우리나라 다른 사상가들의 연구, 다른 방면(문학, 사회학, 예술 등의 분야)에 하나의 새로운 ‘방법’적 논의의 틀을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 연구요약
  • 이 연구는 현존하거나 최근 발견한 퇴계의 4점 초상화, 즉 최근 발견된 ‘조선시대 1점’과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직후 1점,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원권 지폐 속의 표준 영정인) 현대 1점을 통해서, 修己와 治人이라는 두 가지의 ‘退溪’像을, <治人-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內聖的 퇴계상=대내용>라는 관점에서 그 계보와 탄생의 이유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점에 대해 주목하지 못했다. 따라서 근현대를 통해서 새로 구축된 퇴계상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했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서언
    2. 은폐된 ‘퇴계상’ 다시 읽기
    3. 두 가지 ‘退溪’像의 탄생과 흐름
    1)『퇴계선생언행록』의 경우
    2) 근대 이후 퇴계상 정립의 두 흐름:
    <治人的-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的-內聖的 퇴계상=대내용>
    3) 위인으로서의 ‘초연함’의 근거 : ‘敬’
    4. 결어

    위의 목차에 따라 고찰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은폐된 ‘퇴계상’ 다시 읽기> : 그동안 은폐되어 온 퇴계상을 다시 복원하는 것으로 <治人-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內聖的 퇴계상=대내용>의 사상적 근거를 논의한다.
    둘째, <두 가지 ‘退溪’像의 탄생과 흐름> : 종래의 4종의 초상화를 통해서 <治人-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內聖的 퇴계상=대내용>이라는 퇴계상의 탄생과 흐름을 계보론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위인으로서 정립된 퇴계의 인격적 사상적 근거를 ‘敬’ 해석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이퇴계, 초상화, 퇴계상, 성인, 수기치인.
  • 영문키워드
  • Yi Toegye, portrait, a Image of Toegye, Seongin(sage), Sugi-chii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논문은 현존하는 퇴계의 네 점의 초상화(조선시대 1점,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이후-현대 1점)를 통해서 修己-治人이라는 두 가지 ‘退溪’像, 다시 말해서 <治人的-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的-內聖的 퇴계상=대내용>이 존재하게 된 사상적 이유를 계보적으로 밝혀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퇴계는『퇴계선생언행록』에서 보듯이 이미 생존 당시부터 이른바 ‘성자적’ 흔적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초연한, 비범한 일상적 모습에서 우리는 유교에서 지향한 긍극적 경지의 ‘爲聖(성인 되기)’ 즉 超凡入聖의 단면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근저에는 居敬과 窮理의 균형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투호와 혼천의를 동시에 강조한 데서 찾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居敬과 窮理의 균형을 넘어서서 居敬을 더욱 심화시켜간다.『언행록』에서 보듯이 퇴계의 일상적 행위와 처신은 비범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선천적인 성품이 반성적・성찰적인 기질에 기인한 점도 있겠으나, 그가 일생 독실하고 깊이 있게 추구했던 유학의 도덕적 원리들을 그 나름으로 매뉴얼화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내면화・신체화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퇴계의 인간적, 인격적 이미지는 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근현대기라는 굴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초상화에 반영이 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 전하는 퇴계의 초상 네 점 즉 조선시대 1점,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이후-현대 2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조선시대의 퇴계 초상은 현재 천원권 지폐에서 보여지는 병약함, 유순함, 노인-원로의 이미지와도 다르며, 아울러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나온 청년 혹은 무인적인 강인함의 이미지의 초상화와도 다르다. 다시 말해서 엄정함과 위풍당당함, 건장함, 강인함, 그리고 내면적 깊이와 인격적 무게 등등 유교가 지향하는 修己治人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언행록』에 제시된, 治人的 면모(→‘理學 지향적 면모’)와 修己的 면모(→‘心學 지향적 면모’)가 매우 잘 결합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퇴계의 원형적 두 이미지는 근대 이후에 두 가지로 분화된다. 우선, 퇴계를 국가의 질서 건립, 국가의 再建・復興, 자국에 대항하는 타자(외세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외면적 ‘理學’的 측면을 부각하려 할 때는 강한, 엄정한, 청년적 이미지가 요구되었다. 이것은 외향적-치인적 이미지(대외용에 무게)로서,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기(건국후의 남북한 대립기)의 퇴계 초상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퇴계를 국가 내의 지역적, 계층적, 정치적 분열을 지양하는 의미에서 화합과 超黨的 대동단결에 활용하고자 내면적 ‘心學’的 측면을 강조할 때에는 온화함, 유순함, 노인-원로의 이미지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이것은 내향적-수기적 이미지(대내용에 무게)다. 이것은 남한 체제의 공고화 및 남한의 국론 분열과 당파적 대립을 배경으로 한 박정희 정권기의 퇴계 초상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퇴계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읽히고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고정된 퇴계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퇴계는 존재해왔고, 또 존재할 것으로 이해된다. 텍스트 속에 고정된 퇴계는 없으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미지에 의해 퇴계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다.
  • 영문
  • Until now, the Toegye Yi Hwang(1501-1570)' Chosanghwa, a portrait, is not found. So today, we usually imagine Toegye' shape really so through the 1,000 won bill's, created by a modern painter Hyeon Cho Lee Yutae(玄艸 李惟台).
    However, a few years ago I discovered that was a new portrait of Toegye, is made by someone during Japanese Ruling Era of Korea. Then I wrote a paper. titled A Study on Tyoegye's Portrait of Korea in Toegyehaknonjip.
    However, I recently have knew, in addition to this, a new two portrait of Toegye of Joseon Dynasty and modern era are existed in our country. So I decide to to improve them on the basis of these data.
    In addition, I think, through these portraits of Toegye reconsider a Toegyesang, Toegye image, as a Sonbi(士, a true confucian gentleman) in korean confucian context. This paper is written in awareness of these issues. Catching how to transform the image of Toegye, through portraits of Toegye, is very meaningful work, apart from studying the text of Toegye who is left.
    We know, In the period of our modern and contemporary, in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had needed to be established a new Toegye image for the public enlightenment, education, and governance.
    As shown in this paper, Toegye portrait of that era had asked each of imagination and ideology is reflected in it. So there is no one fixed Toegye image, but Toegye image have produced depending on the situation of our country.
    Toegye image, in common, through the Joseon Dynasty, modern, contemporary, was a senior Confucian scholars(國老) who represents Korea society. However, the image portrayed in the Joseon dynasty and modern times are hardy dignified appearance. On the other hand, we feel the image as a weakness scholars. Such this, Toegye creation of the image is currently underway, is not done. Toegye images as Sonbi, so called a true gentleman in Korea, still open in the door to whatever is new.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논문은 현존하는 퇴계의 네 점의 초상화(조선시대 1점,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이후-현대 1점)를 통해서 修己-治人이라는 두 가지 ‘退溪’像, 다시 말해서 <治人的-外王的 퇴계상=대외용>과 <修己的-內聖的 퇴계상=대내용>이 존재하게 된 사상적 이유를 계보적으로 밝혀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퇴계는『퇴계선생언행록』에서 보듯이 이미 생존 당시부터 이른바 ‘성자적’ 흔적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초연한, 비범한 일상적 모습에서 우리는 유교에서 지향한 긍극적 경지의 ‘爲聖(성인 되기)’ 즉 超凡入聖의 단면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근저에는 居敬과 窮理의 균형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투호와 혼천의를 동시에 강조한 데서 찾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居敬과 窮理의 균형을 넘어서서 居敬을 더욱 심화시켜간다.『언행록』에서 보듯이 퇴계의 일상적 행위와 처신은 비범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선천적인 성품이 반성적・성찰적인 기질에 기인한 점도 있겠으나, 그가 일생 독실하고 깊이 있게 추구했던 유학의 도덕적 원리들을 그 나름으로 매뉴얼화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내면화・신체화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퇴계의 인간적, 인격적 이미지는 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근현대기라는 굴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초상화에 반영이 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 전하는 퇴계의 초상 네 점 즉 조선시대 1점, 일제강점기 1점, 해방 이후-현대 2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조선시대의 퇴계 초상은 현재 천원권 지폐에서 보여지는 병약함, 유순함, 노인-원로의 이미지와도 다르며, 아울러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나온 청년 혹은 무인적인 강인함의 이미지의 초상화와도 다르다. 다시 말해서 엄정함과 위풍당당함, 건장함, 강인함, 그리고 내면적 깊이와 인격적 무게 등등 유교가 지향하는 修己治人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언행록』에 제시된, 治人的 면모(→‘理學 지향적 면모’)와 修己的 면모(→‘心學 지향적 면모’)가 매우 잘 결합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퇴계의 원형적 두 이미지는 근대 이후에 두 가지로 분화된다. 우선, 퇴계를 국가의 질서 건립, 국가의 再建・復興, 자국에 대항하는 타자(외세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외면적 ‘理學’的 측면을 부각하려 할 때는 강한, 엄정한, 청년적 이미지가 요구되었다. 이것은 외향적-치인적 이미지(대외용에 무게)로서,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기(건국후의 남북한 대립기)의 퇴계 초상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퇴계를 국가 내의 지역적, 계층적, 정치적 분열을 지양하는 의미에서 화합과 超黨的 대동단결에 활용하고자 내면적 ‘心學’的 측면을 강조할 때에는 온화함, 유순함, 노인-원로의 이미지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이것은 내향적-수기적 이미지(대내용에 무게)다. 이것은 남한 체제의 공고화 및 남한의 국론 분열과 당파적 대립을 배경으로 한 박정희 정권기의 퇴계 초상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퇴계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읽히고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고정된 퇴계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퇴계는 존재해왔고, 또 존재할 것으로 이해된다. 텍스트 속에 고정된 퇴계는 없으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미지에 의해 퇴계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처음으로 학계에 조선시대의 퇴계 초상 등을 공개하고, 원형과 분화적 측면에서 계보적으로 논의하였다.
    (2) 이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발표되어 활용할 수 있다.
    〇 최재목,「退溪象의 두(修己的-治人的) 系譜 탄생에 대한 고찰」,『유학연구』27,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2.12.25)

  • 색인어
  • 퇴계 이황, 초상화, 퇴계상, 수기치인,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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