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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고구려의 발전과 현도군 책구루
The development of Goguryo and Chaek-guru in Hyendo-gu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3S1A5B5A07048622
선정년도 2013 년
연구기간 1 년 (2013년 09월 01일 ~ 2014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박노석
연구수행기관 전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현도군에서 설치한 책구루에 대한 것이다.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주몽이 건국한 나라이다. 하지만 고구려 세력은 고조선 시대부터 존재하였다.(선고구려로 약칭) 서기전 108년에 전한의 무제는 고조선을 점령한 다음해에 선고구려 세력과 연결 혹은 통제하기 위해서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선고구려 세력은 현도군에 저항하였으며, 이 때문에 현도군은 고구려에 밀려 치소를 서쪽으로 옮겨가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도군에서는 책구루(幘溝漊)를 설치하여 선고구려인들과의 교섭창구로 이용하려 하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현도군의 치소가 옮겨가면서 이 책구루는 같이 따라가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본 연구는 이 고구려의 발전과 현도군 책구루에 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연구가 필요하다.
    첫째, 초기 고구려사의 발전과정을 밝힐 수 있다.
    둘째, 선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로 이어지는 초기 고구려사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셋째, 현도군의 이치문제를 밝힐 수 있다.
    넷째, 고구려와 전한, 신, 후한의 관계를 명확히 해 줄 것이다.
    다섯째, 중국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논리를 마련할 수 있다.
    기존 책구루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 초기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던 것에 불과하였고, 전문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연구가 고구려 초기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에 있을 때 연구되었으며, 성립시기와 목적에 대해서만 단편적인 언급이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가 고구려 초기사의 부정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졌다면, 본 연구는 선고구려의 발전과정이라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억측이 아닌 기존 사료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기존의 사료가 말하는 바 대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처럼 본 연구는 기존 자료가 말하고 있는 바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고구려인의 발전과정속에서 책구루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책구루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전문적으로 다루어진 것이 거의 없고, 책구루의 설치 시기, 역할 등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또한 기존의 연구는 최근 고구려 초기사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반영되지 못하고, 과거의 연구 경향을 따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책구루 문제를 세 개의 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서기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면서 형성된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로 책구루가 설치되기 이전의 시기이다. 두 번째로는 현도군과 고구려 세력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면서 책구루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되어 책구루 자체가 없어지던 시점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현도군에서 설치한 책구루에 관한 것이다. 현도군이 설치된 뒤 고구려인들이 여기에 저항하게 되었고, 결국 현도군이 밀려나는 과정에서 책구루가 설치한 것이다.
    책구루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의 발전과정에 대한 것이다. 또한 책구루는 선고구려에서 주몽의 고구려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는 동시에 선고구려와 고구려를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현도군의 중심지가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옮겨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 불명확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책구루의 폐지는 현도군이 다시 중심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현도군이 고구려에 밀려나는 과정을 명확히 할 수 있게 된다.
    책구루가 설치 운영된 시기에 중국은 전한, 왕망의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책구루라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서 고구려와 이들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 논리의 하나로써 중국에서는 고구려가 현도군의 영역내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존재이며, 현도군에 저항하고 이들을 축출하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논리를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본 연구를 통해서 선고구려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시기의 고구려사를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통해서 고구려와 전한, 신, 후한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논리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는 고구려가 현도군에 종속적인것이 아니라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고구려가 현도군을 축출해 나가면서 발전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도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책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 초기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성립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점은 고조선이 멸망한 서기전 108년에서 주몽의 고구려가 성립되는 서기전 37년까지의 약 70여년의 역사를 보충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고구려의 발전상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진 현도군에서 설치한 책구루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책구루는 현도군 설치 이후 고구려와 현도군의 교섭이 이루어졌으나, 고구려의 심한 저항으로 현도군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현도군에서 설치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현도군이 설치되는 시점에서 책구루가 설치되는 시점이 언제이고, 왜 설치하게 되었는가, 책구루를 설치한 목적이 무엇이고, 어떤 계기로 폐지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후한서󰡕에는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고, 고취기인을 주었다는 내용이, 󰡔삼국지󰡕에는 고구려인들이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으며, 고구려 현령이 그 명단을 관리하였으나, 점차 교만해져서 현도군에 오지 않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안에 조복과 의책을 두면 고구려인들이 와서 가져갔는데, 지금도 그 성을 책구루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북사󰡕의 내용도 비슷하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이 점차 교만해져서(현도군 세력을 몰아내게 되면서) 현도군에 와서 이러한 물품을 받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현도군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계속해서 교류를 원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책구루를 설치하였다.
    이때가 언제일까.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에 의하면 서기전 82년에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고 이를 낙랑과 현도군에 합쳤으며,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에는 서기전 75년에 요동 현도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전에는 현도군이 이맥[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고구려는 현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고, 현도군은 지금의 신빈현 영릉진고성으로 옮겨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고구려는 현도군과 교류가 끊어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현도군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책구루를 설치한 것이다.
    현도군에서 책구루를 설치한 목적에 대해서 기존에 이에 대해서는 호시(互市)로서 기능했다는 설과, 조복 의책 등을 매개로 한 외교적 물품 교환행위의 연장으로 보는 설 등이 있어왔다. 하지만 책구루의 형성은 고구려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현도군에서 필요에 의해서 설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인들이 어떤 위세품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이것을 이용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 내부에서는 졸본부여를 계승하여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더욱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책구루는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동명왕대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 유리왕대 왕망의 신과 대립하다가 현도군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점령한 기록, 대무신왕대 후한과 관계개선을 이루었으나, 모본왕대 후한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사항, 태조왕대 이후 후한과의 대립 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속에서 책구루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지󰡕에는 “지금 오랑캐[고구려]가 아직도 이 성을 책구루라 한다”고 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지금’이라고 하는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을 추적한다면 책구루의 소멸시점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본 연구에서는 현도군의 설치와 고구려인의 관계, 이후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변화에 따라 책구루가 설치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어서 책구루의 역할과 설립 주체와 책구루가 없어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구려 초기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제가 고구려와 현도군과의 관계이다. 이 중에서도 현도군에서 설치한 책구루에 대한 것이다. 책구루는 현도군에서 고구려에 대한 통제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책구루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존속하였다.
    기존 책구루에 대한 연구는 설치와 폐지에 중심을 두고서 연구되었다.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 6대 태조왕대설부터 서기전 75년설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폐지 시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들이 제시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책구루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 대해서 재검토하면서,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 경향과 사료에 대한 해석들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책구루는 서기전 75년에 설치되었으며, 유리왕 33년에 폐지되었다. 책구루를 설치한 목적은 고구려인들에 대한 통제가 주 목적이며, 여기에 호시로서의 성격도 있다.
  • 영문
  • Theme indispensable in the early history of Koguryo is the relationship between Koguryo and Hyeondo-gun. It is more important for the Chackguru and Koguryo installed in Hyeondo-gun. Chackguru will be installed for the control of Koguryo in Hyeondo-gun.
    Research so far has been studied for Chackguru around the time lost when made. For installation time varies from King Tae-Jo stand up nyeonseol 75 BC. There are several theories about the time lost.
    This study re-examined for the study of the so far for Chackguru and was made with a new understanding of the research being done in recent years. As a result Chackguru is installed in BC 75 years, was abolished in King Yuri 33 years. Chackguru is intended to install the controls on the Koguryo people, here's personality as a Boundary trad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는 최근 급증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분야가 초기사에 대한 연구이다. 고구려 초기사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먼저 서기전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과, 주몽의 건국 이후로 나뉘고 있다. 이중 주몽의 건국 이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고구려 초기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제가 현도군과의 관계이다. 즉,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 현도군의 퇴축과정에 대한 연구는 곧 고구려의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현도군에서 설치한 책구루(幘溝漊)에 대한 것이다. 책구루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존속하였다. 책구루는 현도군에서 고구려에 대한 통제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책구루에 대한 연구는 전한과 후한에서 현도군을 통한 고구려에 대한 통제책을 알 수 있는 방향임과 동시에, 책구루의 설치와 폐지는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 고구려의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주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기존 책구루에 대한 연구는 설치와 폐지에 중심을 두고서 연구되었다.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 6대 태조왕대설부터 서기전 75년설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폐지 시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들이 제시되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책구루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 대해서 재검토하면서,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 경향과 사료에 대한 해석들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이루어졌다. 책구루의 설치 시점과, 폐지 시점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현도군에서 책구루를 설치한 목적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진행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 고구려인들의 대 중국 저항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설치된 책구루를 통해서 전한에서 고구려인들을 통제하려고 한 정책을 알 수 있게 된다.
    책구루는 전한에서 왕망의 신, 후한초기까지 유지되었으므로, 중국의 정권이 바뀜에도 현도군의 책구루는 유지되었으므로, 이를 통해서 고구려와 이들 나라들의 관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통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나, 고구려의 발전과정을 통해서 고구려의 독자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고구려는 주몽이 서기전 37년에 건국한 고구려국과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고구려인(선고구려)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즉, 고구려인들은 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고조선이 존재하던 시기부터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조선의 영역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나름대로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다음해 현도군이 설치되면서 선고구려는 현도군의 관할하에 있었다. 그러나 선고구려인들은 현도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의 치소를 고구려의 동북쪽으로 밀어내게 되었다.
    현도군은 설치되면서부터 고구려인들을 통제하였고, 이러한 통제의 수단으로 조복과 의책을 활용하였다. 하지만 선고구려인들이 서기전 75년에 현도군을 동북쪽으로 밀어내면서 현도군과 반목하였다. 현도군은 지금의 신빈현 영릉진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독립된 지역내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과, 아직도 현도군의 영향을 받고 있던 고구려인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인들은 현도군의 통제 책에 대해서 따르지 않게 되었고, 현도군에서는 고구려와 경계선에 작은 성을 쌓고, 이곳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고구려인들과 교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후일에 책구루로 불리게 되었다. 책구루는 현도군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쌓은 것이다.
    이 책구루가 만들어지게 된 시기는 선고구려인들이 현도군을 몰아내는 시점, 즉 서기전 75년의 일이다. 현도군은 이 책구루를 통해서 고구려인들을 통제하고자 했으며, 고구려에서도 나름대로 이곳을 이용하여 한(漢)과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현도군은 고구려와 부여 등 북방 민족들과 교류 혹은 통제를 위해서 설치된 것이므로, 비록 치소가 옮겨졌다 할지라도 그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이러한 기능을 계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부족한 식량이나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서 책구루를 이용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왕망의 신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신이 멸망하고 후한이 세워진 이후인 유리왕 33년에 현도군 고구려현과 양맥국을 점령 점령하였다. 이때 현도군은 지금의 무순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책구루가 있던 신빈현 영릉진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이때 쌓아진 성을 활용하면서 책구루라 불렀다.

    활용방안
    현행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의 일반적인 개론서들에서는 변화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고구려 초기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최근의 연구 경향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졸본부여를 계승한 주몽이 건국하기에 앞서서도 고구려 세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는 고구려가 현도군에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고구려가 현도군을 축출해 나가면서 발전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도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책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 초기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성립될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를 통해서 전한에 의해서 고조선이 멸망당하여 영역을 빼앗기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고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언급함으로 하여 고조선과 선고구려, 주몽의 고구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고조선이 멸망한 서기전 108년에서 주몽의 고구려가 성립되는 서기전 37년까지의 약 70여년의 역사를 보충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고구려의 발전상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색인어
  • 고구려, 전한, 신, 후한, 현도군, 책구루, 호시, 졸본부여,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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