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표은 첫째 고려시대 비보사탑과 불상 조성과의 관계를 밝히고, 둘째 비보사탑이 고려 불교와 불교미술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선행연구가 다루지 못했던 비보사탑의 조성원의가 불상 조성에 미친 영향과 양식적 특징을 제시하는 것이다 ...
본 연구의 목표은 첫째 고려시대 비보사탑과 불상 조성과의 관계를 밝히고, 둘째 비보사탑이 고려 불교와 불교미술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선행연구가 다루지 못했던 비보사탑의 조성원의가 불상 조성에 미친 영향과 양식적 특징을 제시하는 것이다. 裨補寺塔이란 풍수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을 사찰, 불상, 탑, 당간 등으로 보완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 전래 후 삼국에서는 일찍부터 국가의 진호를 위해 사원과 탑이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비보사탑은 9세기 중반 선종의 전래와 더불어 선승들은 선종 사원의 입지 선정과 선승의 부도 조영 등의 이상적인 입지를 찾는 과정에서 응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9세기 말에 선승인 道詵에 의해 정립되어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함과 더불어 지방의 귀족 세력과도 결탁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훈요10조」제2조에 비보사탑을 언급할 정도로 불교 사원은 비보의 목적으로 건립되었고 또한 이러한 사원은 국가적인 후원을 받았다. 나아가 비보는 수도를 옮기는 일부터 개인의 명당을 찾는 일까지 포함하여 고려 사회의 정치적 대중적 관심사이기도 했다. 「白雲山內院寺事迹」에 의하면, 비보사탑의 구체적 기능에 대해 “지세가 虛缺한 경우는 절로 보완하는 비보 기능을 담당하게 하고 지나친 지세는 불상으로 누르며, 달아나는 지세는 탑으로 머물게 하고, 등진 지세는 당간을 통해서 불러들이는 비보를 담당하게 한다.”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 온 이후 많은 사원의 창건과 더불어 불상이 조성된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그 조성의 이유도 다양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이나 감은사처럼 국가의 진호를 위하여 또는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되기도 하였다. 또『삼국유사』에서는 전쟁에 나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거나 신이한 기적을 보이는 곳에 사찰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9세기 이후, 신라가 혼란기에 빠지면서 불교계의 동향도 변하고 이에 따라 사원 창건의 목적도 바ㅟ며, 지역도 경주 중심에서 벗어나 전국적으로 넓어진다. 이때 사원의 창건에는 풍수지리설의 관점과 특정한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불교적 조성, 즉 사찰, 탑, 불상, 당간으로 해결하는 비보사탑설이 등장하다. 특히 나말여초에 선종 사원이 전국에 개창되면서 9산 선문으로 대표되는 선종 사찰도 이 풍수 또는 비보사탑에 근거해서 사원을 개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사원의 개창뿐만 아니라 비보사탑에 의거하여 鳳巖寺의 철불 2구가 조성되었다.「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의하면, “사찰의 땅이 오랫동안 동요하지 못하도록 鎭護하기 위해 그 비보 시설로서 기와 담장과 철불상 2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도선 국사가 비보사찰로 조성된 곳에 본존으로 철불이 안치되기도 했다. 운주사의 천 불 천 탑과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의 경우도 도선 국사의 조성으로 전승되어 온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익산 고도리의 석불 2구의 경우도 고을 비보로서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따라서 고려 불상을 고찰함에 있어 비보사탑은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조성된 철불이나 거대 석불의 경우는 예배 대상으로만 조성되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보사탑설로 대표되는 것처럼 ‘원하는 뜻[願意]’에 의거하여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구체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다.
(1) 나말여초 선종 사원에 안치된 철불 중 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願意에 대한 고찰 (2) 도선선사 조성으로 전승된 불상들의 기록과 그 작례들의 양식적 특징을 고찰 (3) 고을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들의 작례들에 대한 양식적 특징에 대한 고찰 (4) 지역적 특색이 강한 고려 불상들의 비보사탑설의 영향 여부에 대한 고찰
기대효과
불교미술에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작례들에 관한 연구에 비해 고려시대의 불상들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실정이다. 이는 삼국과 통일신라의 작례들의 조형미술로서의 우수성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연계성 파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
불교미술에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작례들에 관한 연구에 비해 고려시대의 불상들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실정이다. 이는 삼국과 통일신라의 작례들의 조형미술로서의 우수성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연계성 파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불상은 독특한 형태의 거대 석불들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전체적 형식이나 양식이 전통적 불상의 양식을 따르지 않는 것들이 많다. 필자는 이러한 고려시대의 불상들의 조성 배경과 그 근거를 문헌과 각 작례들의 현지조사를 통한 비교를 통해서 고려 불상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고려불상이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양식적 후퇴했다기 보다는 좀더 한국적인 불상의 양식 또는 고려적인 불상 양식을 밝히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믿는다. 실례로 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고려시대의 불상을 ‘거대하다’ ‘기괴하다’ ‘지방색이 뚜렷하다’ 등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언제나 통일신라에 비해 조형성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고려 불상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생각하며, 고려시대는 분명 전 시대와 다른 조성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려의 불상은 전국적으로 불교문화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또한 개인의 신앙 차원에서 벗어나 마을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공적인 차원으로 불상이 신앙되었다. 그 첫걸음으로서 비보사탑과 불상조성과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분명 고려 불상 전체를 이해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기자신앙과의 관계, 승려의 감득에 의한 불상 등을 밝혀나가면 고려 석불뿐만아니라 마애불까지도 그 종형원의가 파악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보사탑은 풍수적인 관념이 고려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다. 끝으로 비보사탑에 근거한 불상의 자료들을 문헌과 현장조사를 통하여 취합하고 더나아가 고려불상을 지역별, 조성원의별 및 조성 시기별 전후관계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공개함으로서 학계의 보다 활발한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예정이다.
연구요약
나말여초는 정치적·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지방을 근거지로 한 호족들이 등장했다. 한편 불교에서도 선사들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전국에 선종 사원이 개창되고 대표적인 사원으로 구산선문이 개창되었다. 지금까지 수도인 경주 중심 ...
나말여초는 정치적·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지방을 근거지로 한 호족들이 등장했다. 한편 불교에서도 선사들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전국에 선종 사원이 개창되고 대표적인 사원으로 구산선문이 개창되었다. 지금까지 수도인 경주 중심과 그 일대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사원이 개창되고 이때 등장한 이론이 풍수지리설이다. 나아가 땅이 허약하거나 지나치게 강한 곳은 불교의 비보물, 즉 사원, 탑, 불상, 당간 등으로 비보한다는 비보사탑설이 등장했다. 이 비보사탑은 도선국사에 의해 더욱 발전을 보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제2조에 도선국사가 비보의 목적으로 세운 사원 이외에는 창건을 못하도록 했으며, 이후 고려에서 비보사찰들은 국가의 비호를 받았음을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아가 비보사탑은 사원뿐만 아니라 불상도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의하면, “사찰의 땅이 오랫동안 동요하지 못하도록 鎭護하기 위해 그 비보 시설로서 기와 담장과 철불상 2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가지산 보림사도 비보의 위해 16나한상과 천 불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안동 지역은 고을비보를 위해 탑과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는 기록이 『永嘉誌』등에 보이고, 실제 많은 작례들도 남아있다. 또한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들도 주로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선암사 등을 포함한 삼암사와 남원의 선원사, 대복사, 만복사 등이 있다. 고려시대 불상 중에서 도선국사의 조성으로 전해지는 석불과 마애불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 예들은 한결같이 얼굴모양이나 조각 방법에 있어 범상치 않다. 그 예로 운주사 천 불 천 탑 등을 들 수 있다. 또 익산 고도리 석불이나 전남 화순 석불처럼 마을의 허약한 곳을 비보하기 위한 고을비보로서 불상이 조성되어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불상을 고찰함에 있어 비보사탑은 중요한 관점이며, 이는 고려시대 조성된 철불이나 거대 석불이 예배 대상으로만 조성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존의 비보사탑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주로 비보사탑설을 중심으로 나말여초의 구산선문과의 관계를 살피거나 또는 도선의 비보사탑설과 비보사원 등을 중심으로만 고찰되었다. 그리고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은 비보사원에 대한 고찰과 비보물 중의 하나인 異型의 탑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보물로서 불상도 중요한 요소였고, 이에 따라 실제 조상 방법이나 그 표현도 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비보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상에 대한 조사 연구를 통하여 그 전모를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의 기록과 전승 등의 문헌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비보 목적으로 창건된 사찰과 그 사찰에 전해오는 불상들의 현지조사를 실시한다. 즉 선종사원에 안치된 불상, 도선 국사가 조성으로 오는 불상, 고을 비보로 조성된 불상 등을 포함한다. 그래서 비보사탑과 불상 조성의 조성 원의와 양식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들과 기존 전통적인 작례와 다른 점이 밝혀질 것이며, 나아가 고려시대 지역적이며 개성적인 불상의 면모를 밝힐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연구는 고려 불상을 일견 통일성이 없어 지역적 또는 토속적인 경향이 강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이는 고려 불상 특히 다양한 모습의 고려 석불을 고려적인 불상 양식의 특징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비보물로 조성된 불상은 불상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나 조각적인 균정미를 지향한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려 불상을 고찰함에 있어 비보사탑은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철불이나 거대 석불의 경우는 예배 대상으로만 조성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보사탑설로 대표되는 것처럼 ‘원하는 뜻[願意]’에 의거하여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비보사탑은 풍수적으로 어떤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에 사찰, 불상, 탑, 당간 등의 불교건축물을 이용하여 그곳의 기운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는 9세기 말 도선 국사가 정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고려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비보의 목적으로 개 ...
비보사탑은 풍수적으로 어떤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에 사찰, 불상, 탑, 당간 등의 불교건축물을 이용하여 그곳의 기운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는 9세기 말 도선 국사가 정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고려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비보의 목적으로 개창된 사원은 국가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고, 나아가 비보사탑은 국가의 중대사뿐만 아니라 개인의 명당을 찾는 일까지 포함하여 정치적·대중적인 관심사로 자리 잡았다. 또한 비보사탑은 고려시대의 불교미술, 특히 불상을 고찰함에 있어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이는 삼국과 9세기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불상의 조성 원의願意이며, 그 조상造像 목적에 따라 상의 형태나 표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은 고려 불상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와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양식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된다. 먼저 나말여초의 사찰에 봉안된 철불, 즉 봉암사, 남원의 선원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암사 등의 철불이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나아가 철불 중에서 나발이나 얼굴의 범상치 않는 표현에서도 비보와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작례도 있다. 또한 화순 운주사의 불상처럼 도선 국사의 조성으로 전해지는 불상에서도 비보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고려는 전국에 거대한 마애불과 석주형石柱形의 석불이 조성되었다. 종래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상들에 대해 조형 의지의 부족이나 표현의 결핍 또는 생략 등으로 고찰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례들 중에서 그 조성 배경에는 마을의 안녕이나 부족한 땅의 지기를 보완하려는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된 예가 많았다. 이는 돌이 가진 영험함이나 견고성을 가능하면 살리면서 불상을 조성하려고 한 적극적인 조형 의지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고려는 풍수지리적 관심이 비보사탑설로 발전하면서 불교미술에서는 기존과는 다른 재질이나 형식의 불교건축물들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다양함은 지역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문
The theory of complementary temple and stupa(裨補寺塔說) founded by Doseon Great Master is building temple, Buddha statue, stupa or flagpole at a place which has something deficient topographically to protect there from unwholesome vitality. The theory was ...
The theory of complementary temple and stupa(裨補寺塔說) founded by Doseon Great Master is building temple, Buddha statue, stupa or flagpole at a place which has something deficient topographically to protect there from unwholesome vitality. The theory was to be the foundation spirit of Koryeo dynasty (918-1392) so the Buddhist temples founded under the theory were supported by government. Therefore, complementary Temple and stupa play important role when Koryeo moved its capital as well as when people wish to find a propitious site for tomb. This paper considers Buddha statues for topographical complementary. The Metal Buddha statue in BongAmsah Temple and SeonWonsah Temple in Namwon are representative as being built for topographical harmony with the area. The thousand-stone Buddha statues in UnJusah temple, Hwasoon are constructed for national security. Also, the stone-pillar-style Buddha statues in KoDori, Iksan and OSeakRi, YiCheon were built for town's security. The styles of these Buddha statues do not seem to be completed constructs of their styles as traditional Buddha statue.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o the unperfected and aberrant style that there is some intention to protect the sacred rocks by sculpting the rocks as less as possible, so that the Buddha statues can keep the sanctity that the scared rack had before transforming into Buddha. The understanding of Buddha statues built for complementary could be a clue to understand various styles of Buddha statues of heterotypic styles of rock cliff Buddha, and gigantic Buddha statues Koryeo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풍수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에 사찰, 불상, 탑, 당간 등을 세워 그 땅의 기운을 보완하는 것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불교 전래 후 삼국에서는 일찍부터 풍수와 관계없이 국가를 지키기 위한 진호鎭護의 목적으로 사찰과 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 ...
풍수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에 사찰, 불상, 탑, 당간 등을 세워 그 땅의 기운을 보완하는 것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불교 전래 후 삼국에서는 일찍부터 풍수와 관계없이 국가를 지키기 위한 진호鎭護의 목적으로 사찰과 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반 이후, 선종의 전래와 더불어 선승들에 의해 사원에 적합한 입지를 찾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와 더불어 비보사탑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9세기 말 도선道詵에 의해 전국적으로 비보사탑에 의거하여 많은 사찰들이 개창되었다. 나말여초 구산선문으로 대표되는 선종 사찰 중에도 이 비보사탑에 근거하여 입지 선정을 하고 있다. 고려에서 태조 왕건은 비보사탑설을 건국이념으로 삼았으며, 비보의 목적으로 개창된 사원은 국가적으로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다. 나아가 비보사탑설은 수도를 옮기는 일부터 개인의 명당을 찾는 일까지 포함하여 정치적·대중적 관심사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비보를 위해 쓰인 불교건축물은 주로 사찰과 탑이 많았으며, 희양산 봉암사의 철불처럼 불상이 비보를 위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삼국과 9세기 이전에는 보이는 않는 불상의 조성 목적이다. 그리고 나말여초에 새롭게 나타난 철불이란 점도 주목하였다. 또한 고려의 불상에서 도선 국사에 의한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보이며, 이러한 불상도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고찰했다. 고려의 석불 중에서 장방의 석주형石柱形의 불상도 불상의 조성 위치와 조각 표현을 면밀히 고찰한 결과 비보, 특히 마을의 안녕을 위한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밝혔다. 이와 같이 고려 불상에 있어 비보의 목적으로 조성된 작례들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철불이나 석불의 경우에 조성원의가 다르기 때문에 불상의 재질이나 형태 그리고 인상 등에서 조소彫塑를 지향하는 불상과는 다르게 조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보사탑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주로 풍수지리와 불교 특히 구산선문과의 관계, 선종 사찰의 지리적 위치, 도선의 비보사탑설과 그와 관련된 사찰 그리고 고려시대의 사원의 입지 선정과 비보사사裨補寺社에 대한 연구 등이 주로 이루어져왔다. 불교미술 분야에서는 주로 이형탑異形塔의 형식만을 다루었고, 비보사탑의 관점에서 불상을 다룬 연구는 거의 없었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시대의 비보사탑과 불상 조성에 한정하여 고찰한 결과, 종래 연구에서 많은 고려 불상에 대해 조형 의지의 부족이나 표현의 결핍 또는 생략 등으로 고찰했던 것들이 돌이 가진 영험함이나 견고성을 가능하면 살리면서 불상을 조성하려고 한 적극적인 조형 의지의 한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아가 고려의 불교미술에서는 비보사탑의 영향으로 기존과는 다른 재질이나 형식의 불교건축물들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다양함은 지역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게 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먼저 본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나말여초에 성립된 비보사탑은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을 고찰함에 있어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즉 조상造像의 목적에 따라 상의 형태나 표현이 달랐으며, 이는 고려시대 불상의 다양한 형태와 일관성 없어 보이는 양식을 파 ...
먼저 본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나말여초에 성립된 비보사탑은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을 고찰함에 있어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즉 조상造像의 목적에 따라 상의 형태나 표현이 달랐으며, 이는 고려시대 불상의 다양한 형태와 일관성 없어 보이는 양식을 파악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먼저 나말여초 선종 사원에 비보물의 목적으로 철불이 조성되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웠고, 특히 철불의 표현 중에서 굵고 끝이 뾰족한 나발 표현이나 약간 무서워 보이는 범상치 않는 얼굴 인상에서도 비보물로써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도선이 비보의 목적으로 창건했다는 사찰과 이와 더불어 도선의 조성이라는 석불과 마애불도 많다. 이는 실제 불상 양식을 살펴보면 도선이 활동한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도선과의 관련성은 그 불상들이 비보와 관련성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 불상의 하나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장방의 석주형 석불도 마을비보를 목적으로 조성된 예가 많았으며, 상의 면밀한 고찰에 의해 이는 조형 의지의 부족이나 결핍이 아니라 돌의 견고성과 영험성을 살리면서 불상을 나타낸 것으로 고찰했다. 다음으로 본 연구의 활용 방안을 살펴보면, 기존의 불교미술에서 삼국과 통일신라의 작례들에 관한 연구에 비해 고려시대의 불상들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실정이다. 이는 삼국과 통일신라 작례들의 미적 우수성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양식적 연계성 파악의 용이함 때문이었다. 이에 반하여 고려의 불상은 독특한 형태의 많은 거대 석불들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불상들의 전체적 이미지는 전통적 불상의 양식을 따르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 불상의 조성 원의가 다양했음을 밝혔고, 그 다양한 조성 배경에 따라 불상의 형식이나 양식이 일률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는 고려 불상이 삼국과 통일신라에 비해 양식적으로 후퇴했다는 암묵적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일조를 할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고려시대 불교미술 부분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고려시대의 불상은 ‘거대하다’ ‘기괴하다’ ‘지방색이 뚜렷하다’ ‘조성 의지가 부족한 결과이다’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결과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고려 불상이 양식 면에서 조금 뒤떨어진 또는 조성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이해되는 측면이 많다. 본 연구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고려의 불상은 불교의 상징을 넘어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버팀목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도 의미를 두고 싶다. 또한 거대 마애불이나 석불이 불교미술에서 고려 나름의 민족적인 경향이 뚜렷해졌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자연과의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한 가장 한국적인 불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다. 끝으로 고려 불상의 다양한 조성 배경을 살피는 데 있어 본 연구인 비보사탑이 하나의 토대를 마련했음은 물론이고, 이후 조선시대의 불상을 연구함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