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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 고려시대 영토와 국경연구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4S1A5A2A01063371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11월 01일 ~ 2015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인철
연구수행기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동북 9성 관련 각종 사료를 분석 ․ 연구하고 현장 조사를 통하여 동북 9성 위치가 한국사 교과서에 기록된 함경도 함흥평야 지역인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 자료와 전통사학에서 학자들이 주장하는 두만강 7백리 지역에 위치하는지를 새롭게 고증하여 정립시키는 데 있다.
    고려 동북 9성 위치는 고려시대 영토를 현행 한국사 교과서 서술처럼 압록강에서 원산만으로 인정하느냐 ? 아니면 두만강까지 넘었다고 인정하느냐는 분수령이 된다. 이것은 동북 9성의 위치 비정에 따라 고려의 영토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세종 ․ 태종때 동북 9성의 위치는 두만강 7백리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원산만 기선으로 서술하고 있어 사료내용과 비교할 때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서문에 나타난 고려의 강역은“서북쪽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쪽은 고구려의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쪽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료로 볼 때 고려 영토는 서북쪽으로는 고구려의 강역보다 줄어들었지만, 적어도 동북쪽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넓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 국경이 이렇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1920년대 일본관학자들이 동북9성의 위치를 연구하면서 위치를 함경남도 일대로 비정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료를 볼 때 동북 9성의 위치는 두만강 700리가 계속 나온다. 그래서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현 교과서에 기록된 동북 9성의 위치가 함경남도 일대가 맞는지, 아니면 전통사서에서 기록한 두만강 일대가 맞는지 제대로 밝히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함흥평야 일대설, 두만강 유역설이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는 고려의 북쪽 국경선을 제대로 연구해서 명확하게 설정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고려 동북 9성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기록을 한정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 연구에서는 『요사』,『금사』,『흠정만주원류고』등 여러 사료를 검토하여 동북 9성의 위치를 확인하고, 또한 문헌기록에 나오는 지역을 현장답사를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국사 교과서의 지도에는 함흥평야일대로 설정하고 있으나, 함흥이라는 설과 두만강 일대라는 설로 나뉘어져 있어 아직까지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하여 통일된 견해가 없는 실정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고려 국경과 관련한 관심과 연구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때에 동북 9성과 관련된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지도』,『길림통지』,『요사』,『금사』에 나타난 자료와 청나라 황제칙령으로 된『흠정만주원류고』등 국내․외 문헌을 총 망라한 연구는 동북 9성 지리고증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사료에 나오는 지역인 중국 길림성 연변 지역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일대를 현지 조사할 것이다. 이러한 현장조사를 통하여 위치를 명확히 밝히는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향후 통일후 중국과의 국경문제에 대비해서도 이러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청사공정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중심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학계의 총체적인 역사의식을 반영하므로 청소년들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구된 내용들은 앞으로 새롭게 한국사 교과서에 넣어 바른 역사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북 9성 위치에 관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중국과 일본 등 학자들을 초빙하여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토론하는 장을 마련하여 국내 연구자들에게도 우리 나라 국경문제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고, 향후 더 많은 연구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고려 윤관이 17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출정한 곳은 금나라, 즉 여진의 주된 활동지인 오늘날 흑룡강성 남부이다. 그런데 동북9성 위치가 어찌하여 드넓은 만주평원이 아니고 함경도 함흥평야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며, 이에 대한 지리 고증을 통한 연구가 필요하다.
    동북 9성은 고려 중기 윤관이 말갈의 후예들인 여진족들이 살던 지역을 정벌하여 고려의 행정직할지로 만든 곳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동북 9성에 위치에 대한 명확한 연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동북 9성의 위치는 두만강을 넘어야 하는데 두만강 안쪽 함경도 남부에 비정된 것은 한국역사학자 들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대일항쟁기 일제 관학자들이 비정한 것을 광복이후 우리 학자들이 받아드려 오늘날 함흥평야 지역으로 고착화 된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동북 9성 강역 문제는 그 대응을 위하여 많은 연구가 필요함에도 연구에 큰 진전없이 일제가 한반도 안으로 비정한 위치를 그대로 이어 받아 통설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국경선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우리 학계에서는 방치된 상태로 흘러 왔다.
    이 연구는 전통시대 학자들의 주장과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사』 및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분석하고, 주요 쟁점들에 대하여 검토한다. 아울러 국내 ․ 외 연구결과물을 분석하여 동북 9성의 지명 위치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온 과정을 조명해 본다.
    그리고 동북 9성 관련 내용이 기록된 사료인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및 『동국지』, 『길림통지(吉林通誌)』, 『요사』, 『금사』 등에 나타난 자료를 분석 ․ 연구하고 특히 전통학계 권위 있는 사서인 특히 청나라 황제칙령으로 숙신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만주지역 여러 부족의 강역과 도시, 촌락에 대한 역사서에 기록된 사료를 바탕으로 고증하여 편찬한『흠정만주원류고』를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또한, 중국 및 러시아로 현지답사를 실시하여 사료에 나오는 지명을 분석하여 동북 9성의 명확한 위치를 밝혀내고 고증하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려 국경 문제를 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인 동북9성의 위치 규명과 관련한 우리나라 연구물은 많지 않다. 광복 이후 한국학자들이 위치 비정을 새롭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이 비정해 놓은 동북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지역으로 한국사 교과서에 기록하였다. 최근에 출간된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북9성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함흥평야 일대설’, ‘길주 이남설’, ‘두만강 이북설’ 등의 여러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째, 조선 중ㆍ후기 이후에 등장한 ‘길주 이남설’은 당시의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역사관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으로 문헌에 대한 비판적 수용(受容)이 필요하다. 이 주장은 그 당시의 ‘정통론(正統論)’이란 관점에 따라 서술된 것으로써, 고대사부터 당대(當代)까지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 이내에 설정하려는 일종의 고정관념에 따라 작성된 것들이다. 길주 이남설은 조선 중기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자인 한백겸이 함경남도 마운령에서 발견된 석추구기(石樞舊基)와 돌기둥을 윤관이 세운 선춘령 정계비로 추정하면서 비롯된 잘못된 인식이었다. 한백겸이 선춘령 정계비로 잘못 인식한 비석 등은 1929년 최남선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마운령비]이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한백겸이 주장한 동북9성의 길주 이남설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그 주장이 답습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주 이남설의 본질이다.
    둘째, 대일항쟁기의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이 주장한 ‘함흥평야설’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를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역사관점 즉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작성된 것이므로, 광복 이후 비판적으로 극복되었어야 할 것들이 분명하지만, 아직도 일제가 만든 소위 ‘식민사관의 논리’가 한국사 서술에 일부 작용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이다.
    셋째, 조선 전기에 간행된 사료를 근거로 도출된 것이 ‘두만강 이북설’이다.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조선왕조실록󰡕ㆍ󰡔용비어천가󰡕ㆍ󰡔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면, 동북9성은 두만강 이남 지역에 비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오히려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있었다고 비정함이 역사적 사실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문헌들을 역사지리적으로 검토하면,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있었다는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용비어천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공험진ㆍ선춘령 관련 기록을 토대로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보면 이 기록들은 현지 조사 자료를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자료들의 거리와 지명 등을 근거로 현지를 답사하여 고증한 결과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오배산성에 비정할 수 있고, 선춘령은 고려령에 위치했음을 비정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실지 답사를 통하여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가 파악되며, 동북 9성은 실제로 기록에 나오는 대로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위치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동북 9성에 대하여 앞으로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와 『용비어천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기록된 내용이 사실임을 확고히 하여 한국사 교과서에 두만강 이북 700리에 동북 9성이 실재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국경문제는 앞으로 남북통일 이후 주변국과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고, 우리 학계 내에서 국경문제와 관련한 중요 사항은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명확히 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 영문
  • There are not many Korean research results on location investigation of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After restoration of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although Korean Studies scholars had to renew the location, they recorded in Korean history textbook that the location of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東北9城) was located in the Hamheung Plain(咸興平野) region, which was located by Japanese scholars. in a textbook recently published, it is written that the location of 9 Fortresses of the Northeas is not yet identified, It has conflicting claims with three theories ‘ the Hamheung Plain theory(咸興平野設)’, ‘Gilju south theory(吉州 以南說)’, ‘Duman River north theory(豆滿江 以北說)’
    First, ‘Gilju south theory’ that emerged after the postmid-Joseon Dynasty, reflects medieval and feudal historical perspective of those days which needs critical acceptance in accordance with the reference. This claim was described by the perspective called ‘Orthodoxy(正統論)’ at that time. It was written under the stereotype of limiting historical domain from the ancient history to the history of the day. Gilju south theory started as a misunderstanding by Han Baek-gyeom(韓百謙), the founder of Korean historical and geographical studies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presuming that Seokchugugi(石樞舊基) and a stone pillar found in Hamgyeongnam-do Maullyeong(摩雲嶺) were stood as Seonchullyeong(先春嶺) Jeonggyebi(national boundary monument, 定界碑) by Yun Gwan(尹瓘). The headstone, mistakenly known as Seonchullyeong Jeonggyebi(先春嶺 定界碑) by Han Baek-gyeom was found out that it was Jinheungwang(眞興王) Sunsubi(monument of trip royal, 巡狩碑)[Maullyeongbi, 摩雲嶺碑] by Choe Nam-seon(崔南善) in 1929. However, Gilju south theory of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claimed by Han Baek-gyeom was followed by many scholars afterwards. This is the essence of Gilju south theory
    Second, during Daeilhangjaenggi(period of struggle toward Japan, 對日抗爭期), Japanese government scholars ‘the Hamheung Plain theory’ claim was a created as a historical perspective for a purpose to turn the Korean Peninsula and Manju into permanent colonies. Therefore the claim was based on the colonial view of history(植民史觀) which should have been overcome critically after the Independence. However, it is very sad reality that the Japanese Empire’s creation, ‘Logic by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is still partially dominated in Korean history description.
    Third, The theory, emerged from historical materials from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is ‘Duman River north theory’. By examining the records thoroughly from 󰡔Goryeosa(History of Goryeo, 高麗史)󰡕ㆍ󰡔Goryeosajeoryo (importantly abridged History of Goryeo, 高麗史節要)󰡕ㆍ󰡔Joseonwangjosillok(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朝鮮王朝實錄)󰡕ㆍ󰡔Yongbieocheonga(Songs of flying dragons, 龍飛御天歌)󰡕ㆍ󰡔Sinjeungdonggugyeojiseungnam(newly Increased books for a great role model of Dongkuk geography, 新增東國輿地勝覽)󰡕 and others, there would have been so many difficulties to have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in (Duman River north region to be located, It is historically appropriate to claim that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was more likely to be located in Duman River north region. Examining these written records in historical-geographical view, A definite conclusion can be drawn that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was located in Duman River north region.
    On the basis of GongheomjinㆍSeonchullyeong related records from 『Sejongsillok』 「Jiriji」 and 『Yongbieocheonga』 and 『Sinjeungdonggugyeojiseungnam』 and others, if one explore the site personally, it is clear that those records are based on materials acquired from field research. The results of doing the field exploration on the basis of streets and geographical names from written materials are that Gongheomjin is located in Obaesanseong(mountain fortress of Obae, 五排山城) north from Duman River and Seonchullyeong is located in Goryeoryeong(高麗嶺) thoroughout this site exploration, the location of Gongheomjin(公嶮鎭) and Seonchullyeong(先春嶺) can be figured out and it is confirmed cleary that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was actually located in 700-lis(里) north from Duman River in accordance to the recorded materials.
    By doing more in-depth study in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firm up th facticity of the recorded descriptions from 『Sejongsillok』 「Jiriji」 and 『Yongbieocheonga』 and 『Sinjeungdonggugyeojiseungnam』 , The fact that 9 Fortresses of the Northeast existed in Duman River north 700-lis(里) has to be recorded precisely in Korean history textbook .
    After the re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the boundary issue will be a very crucial problem with neighbour countries from now on. In our academic world, an important matter, that is related to the boundary issue, should be established scientifically and logicall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려 국경 문제를 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인 동북9성의 위치 규명과 관련한 우리나라 연구물은 많지 않다. 광복 이후 한국학자들이 위치 비정을 새롭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이 비정해 놓은 동북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지역으로 한국사 교과서에 기록하였다. 최근에 출간된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북9성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함흥평야 일대설’, ‘길주 이남설’, ‘두만강 이북설’ 등의 여러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째, 조선 중ㆍ후기 이후에 등장한 ‘길주 이남설’은 당시의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역사관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으로 문헌에 대한 비판적 수용(受容)이 필요하다. 이 주장은 그 당시의 ‘정통론(正統論)’이란 관점에 따라 서술된 것으로써, 고대사부터 당대(當代)까지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 이내에 설정하려는 일종의 고정관념에 따라 작성된 것들이다. 길주 이남설은 조선 중기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자인 한백겸이 함경남도 마운령에서 발견된 석추구기(石樞舊基)와 돌기둥을 윤관이 세운 선춘령 정계비로 추정하면서 비롯된 잘못된 인식이었다. 한백겸이 선춘령 정계비로 잘못 인식한 비석 등은 1929년 최남선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마운령비]이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한백겸이 주장한 동북9성의 길주 이남설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그 주장이 답습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주 이남설의 본질이다.
    둘째, 대일항쟁기의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이 주장한 ‘함흥평야설’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를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역사관점 즉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작성된 것이므로, 광복 이후 비판적으로 극복되었어야 할 것들이 분명하지만, 아직도 일제가 만든 소위 ‘식민사관의 논리’가 한국사 서술에 일부 작용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이다.
    셋째, 조선 전기에 간행된 사료를 근거로 도출된 것이 ‘두만강 이북설’이다.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조선왕조실록󰡕ㆍ󰡔용비어천가󰡕ㆍ󰡔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면, 동북9성은 두만강 이남 지역에 비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오히려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있었다고 비정함이 역사적 사실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문헌들을 역사지리적으로 검토하면,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있었다는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용비어천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공험진ㆍ선춘령 관련 기록을 토대로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보면 이 기록들은 현지 조사 자료를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자료들의 거리와 지명 등을 근거로 현지를 답사하여 고증한 결과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오배산성에 비정할 수 있고, 선춘령은 고려령에 위치했음을 비정할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북9성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함흥평야 일대설’, ‘길주 이남설’, ‘두만강 이북설’ 등의 여러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직까지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하여 통일된 견해가 없는 실정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고려 국경과 관련한 관심과 연구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때에 동북 9성과 관련된 『세종실록』「지리지」,『용비어천가』및『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문헌 자료를 토대로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현장조사를 통하여 동북 9성의 위치를 명확히 밝히는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결과물은 향후 통일후 중국과의 국경문제 논란에 대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청사공정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중심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연구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동북9성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한국사 교과서에 명확하게 기록하여 바른 역사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길주이남설, 함흥평야설, 두만강이북설, 공험진, 선춘령, '세종실록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오배산성, 고려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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