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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 관계에서 조공과 회사의 의미
The Meaning of Tribute and Return Presents in Goryeo-Mongol Relation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박사후국내연수)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1024016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2 년 (2016년 07월 01일 ~ 2018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정동훈
연구수행기관 서울시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수는 고려-몽골 관계에서 양국이 물자를 교환하는 행위의 성격을 분석하여, 이것이 양국관계에서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그 성격을 밝히기 위해 고려-몽골 사이의 물자 교환 양태를 같은 시기의 몽골제국이 다른 외부의 정치체들, 피복속지역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등장했던 물자 교환의 양상들과, 그리고 다른 시기 한중관계에서 나타났던 그것들과 비교하여 검토할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조공과 회사는 기본적으로 물자의 교환이라는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중화질서(中華秩序)의 체현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더 강조되는 관행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주변국에서는 자국의 특산물을 선사함으로써 중국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였고, 조공을 받은 중국은 이른바 후왕박래(厚往薄來)라는 이념에 근거해서 넉넉하게 회사를 내림으로써 황제의 덕을 과시하였다는 것이다. 경제적 행위로서의 조공과 회사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책봉과 더불어 국제관계를 해명하는 중심 제도의 하나로 인정되어왔다. 이에 따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공체제, 조공시스템 등으로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몽골제국이 피복속지역, 혹은 주변의 정치체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드러난 물자 교환 행위에는 위와 같은 전통적 화이질서의 조공과 회사와는 다른 논리적 근거가 적용되었다. 몽골 정권은 자신들에게 정복된 지역과 인민들이 복속의 대가로서 경제적인 공여를 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피복속지역에 부과된 경제적 부담은 몽골 정권과 해당 지역의 역사적 관계, 복속의 방식 등의 정치적 요소, 그 지역의 생산력 수준이나 기존의 수취 방식 등 경제적 요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다. 반대로 몽골 정권이 피복속지역, 혹은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물자를 내려주는 방식도 제도화되어 있었다. 대칸이 몽골 제왕들에게 해마다 사여해주는 방식, 즉 세사(歲賜)가 그것이다. 몽골 중앙 조정은 피복속지역으로부터 징수한 물자의 일부를 해당 지역에 분봉을 받은 제왕들에게 분배해주었는데, 이는 몽골 정권의 가산(家産) 분배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즉 과거의 의례적인 조공과 회사와는 다른 역사적 전통,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중국과 주변국, 더 정확하게는 양국의 군주 사이의 물자 교환이라는 점에서 모든 현상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시대였는지에 따라, 또한 어느 지역이었는지에 따라 그 관행은 모두 다르게 나타났다. 나아가 이는 해당 시기에, 중국이 해당 지역과 맺은 외교 관계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연수에서는 고려와 몽골 사이의 물자 교환 관행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양국관계의 역사적 성격, 거기에 드러나는 몽골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의 고려의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현상 자체를 평면적으로 검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비교사적인 연구방법을 적극 활용하여 그것을 공시적ㆍ통시적 차원에서 분석할 것이다.
  • 기대효과
  • 이 연수가 성공적으로 수행될 경우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관련 연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첫째, 고려-몽골 관계의 성격을 재조명하기 위한 소재를 제공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 양국관계의 성격을 논할 때에는 주로 고려국왕의 위상을 분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150여 년에 이르는 기간에 대해 시기 구분 없이 하나로 간주하는 듯한 경향성도 확인된다. 이 연구에서는 경제적 교환행위라는 새로운 소재에 주목하여 양국관계의 성격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경우 교환 행위의 경향성이 고려 고종대, 원종대, 충렬왕~충선왕대, 충숙왕~충정왕대, 공민왕대 이후 등 몇 단계에 걸쳐 변화하였고, 거기에 반영된 양국관계의 성격도 달라졌음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몽골제국이 주변의 피복속지역에 시행했던 수취와 재분배에 대해 중요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기존에는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개별 지역에 대한 분석을 축적하거나, 혹은 몽골의 일원적인 수취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를 검출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행해졌다. 그러나 정작 핵심적인 주변국의 하나였던 고려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연수 결과는 몽골제국의 경제 운영 양태에 대한 연구에 한 사례를 더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원칙을 재검토해볼 여지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셋째,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혹은 한중관계를 설명해온 이른바 조공시스템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행된 역사적 배경과 근거하고 있는 양국관계의 성격에 따라 그 양태는 다양하게 바뀔 수 있다. 특히 중국을 차지한 왕조의 종족, 그들의 문화적 전통에 따라 물자 교환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달랐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연수 결과는 조공과 회사는 의례적ㆍ상징적이고 호혜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다든지, 따라서 ‘조공무역을 통한 실리 외교’가 실시되었다든지 하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나아가 장기간의 한중관계사를 조공시스템, 혹은 책봉-조공관계라는 단일한 체제로 설명하는 통념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1년차 연수에서는 고려에서 몽골에 물자를 공여한 행위의 성격을 분석할 것이다. 한문 사료에서는 고려에서 몽골에 제출한 물자를 ‘공물(貢物)’, ‘방물(方物)’, ‘세공(歲貢)’, ‘세폐(歲幣)’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은 단순히 사례를 열거한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 개개의 물자 제출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나, 그러한 행위가 근거하고 있었던 양국관계의 성격에 대해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자신의 지배 하에 편입된 각 지역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성격의 물자 징발을 시행해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피지배층은 과거부터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세금 외에도 복속의 대가로 몽골에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지도록 요구받았다.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전자를 칼란(qalān), 후자를 쿱추르(qubchūr)라고 하여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구성은 해당 지역의 생산양식이나 복속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몽골제국이 고려에 요구했던 물자의 성격 역시 양국관계의 전개에 따라 다른 범주로 이해되며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종 6년(1219)부터 한동안은 고려로부터 거두어갔던 물자는 몽골 입장에서는 고려가 복속의 대가로 치러야 할 경제적 부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위구르의 사례와 유사성을 보인다. 원종대 이후로는 고려 측에서 이른바 ‘세공(歲貢)’을 보냈음이 확인된다. 세공에는 정해진 물자의 액수가 있었으며, 정해진 납부 주기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세공은 몽골이 간접 지배 영역에 부과했던 경제적 부담의 성격과 유사한데, 비슷한 사례로는 안남과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을 들 수 있다.
    양국의 왕실 통혼을 통해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이라는 제왕(諸王)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그때까지 고려에 부과되었던 세공은 공식적으로 혁파되었다. 이후 사료에 나타나는 고려의 물자 제출은 대부분 ‘방물(方物)’로 표현되는데, 이는 고려의 특산물을 정해진 품목이나 액수의 제한 없이, 비정기적으로 바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후의 물자 제출은 고려-송ㆍ거란ㆍ금 관계에서 나타났던 전통적 의미의 조공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4세기 이후로는 몽골 조정의 유력자들, 관부들이 개별적으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물자를 요구하거나 혹은 직접 징발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국가간 외교 관계에서의 조공과는 다른, 개별 행위자들의 직접 개입에 의한 일방적 징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2년차 연수에서는 몽골 조정에서 고려에 물자를 사여하는 행위가 시기별로 가지는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이는 몽골제국 전체의 구성 가운데 고려가 차지하는 위상과도 연결되는 문제일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기에 몽골에서 고려에 보낸 물품의 종류나 양은 그 반대에 비해 턱없이 적었으며 정기적인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물품 하사를 조공에 대한 답례라는 전통적 의미의 ‘회사(回賜)’로 보기는 어렵다. 몽골제국의 대칸은 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몽골 제왕들에게 세사(歲賜)라는 형태로 그들 몫의 일정액을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몽골어로 배분(配分)을 뜻하는 쿠비(qubi)로 표현되고 인식되었다. 그 구성은 각 제왕들이 분봉받은 지역의 생산력이나 해당 지역에 대한 연고의 역사적 내력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몽골과 고려의 전쟁 기간에는 고려에서 제출한 일종의 예물에 대하여 답례의 차원에서 소정의 물품이 전달된 사례가 확인된다. 원종대 이후에는 친조(親朝)를 단행한 국왕이나 세자에게 이동 경비 차원에서 일회적으로 비용을 보조해준 정도가 확인된다.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으로서 몽골 황실의 제왕의 일원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에게 다른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사가 주어진 일은 없었다. 원칙적으로 세사란 분봉을 받은 지역의 토지와 인민들로부터 수취한 세금 가운데 일부를 제왕의 몫으로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려에 대해서는 몽골에서 호구를 파악하거나 그에 입각하여 직접적인 징세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이 타당하다면 고려는 몽골제국의 다른 영역에 비해 훨씬 독자적인 징세 행정과 경제적 분배를 실행한 ‘외국’으로 인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4세기 전반에 이르면 고려국왕뿐만 아니라 고려의 관료들, 때로는 고려 국내의 사원들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보초를 사여한 사례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이 역시 고려에서 제공한 방물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었다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즉 전통적 의미의 회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고려-몽골 관계에서 양국의 물자 교환 행위의 양태를 파악하고, 그것을 같은 시기 몽골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정치체들, 그리고 다른 시기의 한중관계의 그것과 폭넓게 비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공과 회사라고 하는 이름은 다른 시기의 한중관계와 대체로 동일하지만, 실제로 그 이름 아래 시행되고 있었던 물자 수수 관행의 성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이는 고려-몽골 관계의 각 시기에 따라서도 달랐다. 조공과 회사 각각의 품목과 수량을 따지는 것은 현재의 사료 상황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이 시행된 배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첫째는 중국적ㆍ전통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 둘째는 몽골적ㆍ유목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의례적ㆍ명분적 상하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반복되었으며, 그에 따른 경제적 실리는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반면에 후자는 압도적 상하관계에 입각해서 지배하는 측에서 상대로부터 거대한 실리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으로 관철되었다. 몽골제국의 사례에서 해당 피복속지역이 제국의 완전한 변방이라면 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수도 있었다. 다만 몽골의 입장에서 고려의 경우 일본 정벌, 혹은 일본으로부터의 방비이라는 추가적인 과제가 놓여 있고, 또한 거기에 고려의 협력이 절실했으므로, 이를 활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적절한 선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국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가 확연하게 변화한 것은 충렬왕 7년(1281)의 일이었다. 이해에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이라는 제왕(諸王)의 지위를 확고히 인정받으면서, 원종 대 강화 성립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던 ‘세공(歲貢)’이 면제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즉 몽골적ㆍ유목적 의미의 수취 성격이 사라지고, 고래로 이어져온 중국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충렬왕이 부마의 지위를 얻게 됨에 따라 고려-몽골 관계에서도 몽골적인 요소가 대거 도입, 혹은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적어도 물자 수수 관계에서는 반대로 기존의 몽골적 요소들이 대거 약화되고 오히려 전통적인 중국적 논리가 더 많이 활용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양국 관계를 수식하는 논리의 변화, 더 나아가 양국 관계 그 자체의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몽골제국이 팽창 일로를 걷던 쿠빌라이 재위 초반, 1270년대까지는 고려를 제국의 판도 아래 들어온 다른 피복속 지역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리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기존의 한중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같은 시기 몽골의 피복속 지역에서 광범하게 확인되는 세공, 즉 정기적인 수취를 고려에서도 거두던 것이 이를 대표한다. 그러다가 쿠빌라이 재위 중반 이후 중국적인 제도와 관행을 대거 차용해가면서,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주변국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전통적 논리를 적극 동원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세공도 의례적 성격을 가지는 예물 정도로 축소되었다.
    다만 몽골 측에서 고려에 부여하는 물자의 명목에는 같은 시기에 반대 방향의 변화가 있었다. 고려국왕에게 제국의 다른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사(歲賜)를 준다는 언급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상 그러하였을 뿐이다. 몽골제국 중앙이 실제 고려의 인구와 생산에 기반해서 수취를 행하지 않는 상황, 즉 제국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고려국왕의 독자적인 통치가 인정되는 환경에서 국왕에게 그 몫을 분배하는 관행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자의 관계를 우호적인 방식으로 분식(粉飾)하는 가운데서 가능한 모든 레토릭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
  • The study is aimed at identifying the pattern of exchange between the Goryeo and Mongol Empire, and comparing it broadly with that of other polities engaged in relations with the empire at the same time and with that of Korea-China relations at different times.
    The names of the tribute and the return gift were largely the same as those of the Korea-China relations at different times, but the nature of the material-exchanging practice under the name was quite different, depending on the period of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If it is divided into two large groups according to the background of its implementation and the meaning it contains, the first is Chinese oriented and traditional tribute and return gift, and the second is nomadic oriented and economic ones.
    The former demanded symbolic action, which was repeated in the sense of maintaining a formal and justifiable relationship, and the resulting economic benefits were not significantly valued. The latter, on the other hand, was achieved by directly bringing huge profits from the dominant. In the case of the Mongolian Empire, if the area was a complete exile of the Empire, it could have been realized in an extreme way. However, from Mongolia's perspective, the additional task of the Japanese conquest or defense from it lies in the situation where the cooperation of the Goryeo Dynasty was desperately needed, so they had to find a proper way to utilize and mobilize it.
    In this year, King Chungnyeol's position as the Imperial Son-in-Law and king of the Goryeo Dynasty was firmly recognized, and the the Goryeo Dynasty was exempted from paying the annual tribute that lasted for 20 years to the Mongolian Empire. The nature of tax with a nomadic origin disappeared, and they were converted to Chinese traditional tribute. As King Chungnyeol gained the status of the Imperial Son-in-Law, it was understood that Mongolian elements were introduced or applied to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as well. At least, however, in the opposite case, the Mongolian elements were largely weakened and the traditional Chinese logic was used more.
    Such a change can be interpreted as a change in the logic of the two countries' relationship, and further a change in the nature of the relationship itself. In the early days of the Kublai throne, when the Mongol Empire was walking along its expansion path, it showed an intention to manage the Goryeo Dynasty in a similar way to other masked areas that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empire. This is representative of the annual tribute collected in consideration of what is widely seen in the serving areas of the Mongol Empire - but not found in the existing Korea-China relations - during the same period. However, as the Chinese practices were borrowed in the Kublai regime, it can be understood that the traditional logic was actively employed in the way of treating neighboring countries in East Asia. As a result, the annual tribute in the past had also been reduced to a ceremonial gift.
    The study is aimed at identifying the pattern of exchange between the Goryeo and Mongol Empire, and comparing it broadly with that of other polities engaged in relations with the empire at the same time and with that of Korea-China relations at different times.
    The names of the tribute and the return gift were largely the same as those of the Korea-China relations at different times, but the nature of the material-exchanging practice under the name was quite different, depending on the period of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If it is divided into two large groups according to the background of its implementation and the meaning it contains, the first is Chinese oriented and traditional tribute and return gift, and the second is nomadic oriented and economic ones.
    The former demanded symbolic action, which was repeated in the sense of maintaining a formal and justifiable relationship, and the resulting economic benefits were not significantly valued. The latter, on the other hand, was achieved by directly bringing huge profits from the dominant. In the case of the Mongolian Empire, if the area was a complete exile of the Empire, it could have been realized in an extreme way. However, from Mongolia's perspective, the additional task of the Japanese conquest or defense from it lies in the situation where the cooperation of the Goryeo Dynasty was desperately needed, so they had to find a proper way to utilize and mobilize it.
    In this year, King Chungnyeol's position as the Imperial Son-in-Law and king of the Goryeo Dynasty was firmly recognized, and the Goryeo Dynasty was exempted from paying the annual tribute that lasted for 20 years to the Mongolian Empire. The nature of tax with a nomadic origin disappeared, and they were converted to Chinese traditional tribute. As King Chungnyeol gained the status of the Imperial Son-in-Law, it was understood that Mongolian elements were introduced or applied to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as well. At least, however, in the opposite case, the Mongolian elements were largely weakened and the traditional Chinese logic was used more.
    Such a change can be interpreted as a change in the logic of the two countries' relationship, and further a change in the nature of the relationship itself. In the early days of the Kublai throne, when the Mongol Empire was walking along its expansion path, it showed an intention to manage the Goryeo Dynasty in a similar way to other masked areas that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empire. This is representative of the annual tribute collected in consideration of what is widely seen in the serving areas of the Mongol Empire - but not found in the existing Korea-China relations - during the same period. However, as the Chinese practices were borrowed in the Kublai regime, it can be understood that the traditional logic was actively employed in the way of treating neighboring countries in East Asia. As a result, the annual tribute in the past had also been reduced to a ceremonial gift.
    However, there was a change in the opposite direction at the same time in the name of the materials that the Mongol Empire gave to Goryeo Dynasty. It was mentioned that the king of Goryeo was given an annual grant just like other Imperial Princes of the Empire. However, this was only nominal. It was hard to think of the practice of distributing its share to the king in an environment in which the central Mongolian Empire did not collect based on the population and production of the actual Goryeo Dynasty, i.e. in which the King's independent rule was recognized, unlike in other areas of the Empire. It may be understood that all possible red-tape arrangements were mobilized in a friendly mann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고려-몽골 관계에서 양국의 물자 교환 행위의 양태를 파악하고, 그것을 같은 시기 몽골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정치체들, 그리고 다른 시기의 한중관계의 그것과 폭넓게 비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공과 회사라고 하는 이름은 다른 시기의 한중관계와 대체로 동일하지만, 실제로 그 이름 아래 시행되고 있었던 물자 수수 관행의 성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이는 고려-몽골 관계의 각 시기에 따라서도 달랐다. 조공과 회사 각각의 품목과 수량을 따지는 것은 현재의 사료 상황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이 시행된 배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첫째는 중국적ㆍ전통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 둘째는 몽골적ㆍ유목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의례적ㆍ명분적 상하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반복되었으며, 그에 따른 경제적 실리는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반면에 후자는 압도적 상하관계에 입각해서 지배하는 측에서 상대로부터 거대한 실리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으로 관철되었다. 몽골제국의 사례에서 해당 피복속지역이 제국의 완전한 변방이라면 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수도 있었다. 다만 몽골의 입장에서 고려의 경우 일본 정벌, 혹은 일본으로부터의 방비이라는 추가적인 과제가 놓여 있고, 또한 거기에 고려의 협력이 절실했으므로, 이를 활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적절한 선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국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가 확연하게 변화한 것은 충렬왕 7년(1281)의 일이었다. 이해에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이라는 제왕(諸王)의 지위를 확고히 인정받으면서, 원종 대 강화 성립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던 ‘세공(歲貢)’이 면제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즉 몽골적ㆍ유목적 의미의 수취 성격이 사라지고, 고래로 이어져온 중국적 의미의 조공과 회사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충렬왕이 부마의 지위를 얻게 됨에 따라 고려-몽골 관계에서도 몽골적인 요소가 대거 도입, 혹은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적어도 물자 수수 관계에서는 반대로 기존의 몽골적 요소들이 대거 약화되고 오히려 전통적인 중국적 논리가 더 많이 활용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양국 관계를 수식하는 논리의 변화, 더 나아가 양국 관계 그 자체의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몽골제국이 팽창 일로를 걷던 쿠빌라이 재위 초반, 1270년대까지는 고려를 제국의 판도 아래 들어온 다른 피복속 지역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리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기존의 한중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같은 시기 몽골의 피복속 지역에서 광범하게 확인되는 세공, 즉 정기적인 수취를 고려에서도 거두던 것이 이를 대표한다. 그러다가 쿠빌라이 재위 중반 이후 중국적인 제도와 관행을 대거 차용해가면서,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주변국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전통적 논리를 적극 동원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세공도 의례적 성격을 가지는 예물 정도로 축소되었다.
    다만 몽골 측에서 고려에 부여하는 물자의 명목에는 같은 시기에 반대 방향의 변화가 있었다. 고려국왕에게 제국의 다른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사(歲賜)를 준다는 언급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상 그러하였을 뿐이다. 몽골제국 중앙이 실제 고려의 인구와 생산에 기반해서 수취를 행하지 않는 상황, 즉 제국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고려국왕의 독자적인 통치가 인정되는 환경에서 국왕에게 그 몫을 분배하는 관행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자의 관계를 우호적인 방식으로 분식(粉飾)하는 가운데서 가능한 모든 레토릭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는 조공과 회사라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자 개념이 가지는 실제 의미를 실제 사례를 통해 각각 다르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연구에서는 긴 한중관계 가운데 고려-몽골 관계에서의 조공과 회사에 대해 검토하며, 이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다른 시대의 사례들과 비교하고자 하였다. 다만 다른 시대, 예컨대 고려-송 관계, 조선-명 관계 등에서 경제적 교환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비교군 자체를 분석하는 데에도 상당한 공력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역으로, 이 연구를 통해 마련한 분석의 준거를 다른 시대에 확대 적용하는 방식으로 연구결과를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조공의 경우, 한반도 왕조에서 중국 왕조에 물자를 진헌하는 행위를 의례적인 수준에서 자발적으로 마련하는 예물과 실제 가치가 높으며 상대에 의해 고정된 세폐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로, 조공에 대한 보상이라는 추상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개별 조공에 대해 주어진 보상인지, 혹은 포괄적이며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인지를 구분하여 파악한다면, 다른 시대의 특징도 더 잘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 연구의 성과는 한중관계가 고려-몽골 관계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에 어떠한 연속과 단절을 보이는지를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컨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시행되었던 세공(歲貢)은 이전 시기의 고려-거란ㆍ금 관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으로, 어디까지나 몽골적인 통치 방식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례가 되어 14세기 후반 명의 홍무제(洪武帝)는 ‘복속의 징표’로서 고려에 세공을 납부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액수는 대폭 축소되었으나 이후 조선-명 관계의 마지막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한중관계 전반에서 조공ㆍ회사와 같은 반복된 관행, 혹은 제도들이 각 시기마다 어떠한 의미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하는 것을 향후의 연구 과제로 삼고자 한다.
  • 색인어
  • 조공(朝貢), 회사(回賜), 세공(歲貢), 예물(禮物), 세사(歲賜)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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