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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 히믈러의 선조의 유산(Ahnenerbe) 정책에 따른 티벳 탐험의 실상에 대한 분석
An Analysis of the reality of the Tibet-Expedition according to the Ahnenerbe-politics of Himmler in the Nazi-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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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7916523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1 년 (2016년 09월 01일 ~ 2017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두행숙
연구수행기관 서강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표는 과거 독일의 나치 시대에 주요 정책이었던 ‘아리안종 우월주의’와 관련해, 특히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던 친위대(SS)의 수장(首長) 하인리히 히믈러(1900~1945)에 의해 ‘선조의 유산’(Ahnenerbe) 정책이 추진된 과정에서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는지를 특히 그의 ‘티벳 탐험’ 수행과 관련해서 분석하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믈러는 나치의 고위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간주되는데, 그가 히틀러의 명에 따라 인종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개입하였고, 또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전황이 독일에 불리해지자 히틀러를 배반하고 자신이 통치자가 되려고 하다 실패하자 탈출하다 연합군에 잡혀 자살한 비열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 한편으로는 히틀러가 추구한 ‘아리안 우월주의’ 정책을 매우 열렬히 수행하면서 이를 동양, 특히 티벳 지역에까지 확대해 추진하려 했던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도 그 동안 그가 비전문적인 오컬트(Occultism, 祕敎主義) 사상에 심취해 자신의 엘리트 SS 대원들을 그곳으로 파견한 것이라고 보고, 그 탐험의 목적과 과정 및 결과에 대해 폄하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의 생각으로는, 그의 티벳 탐험 추진이 단순히 아마추어적이거나 오컬트 사상에 심취한 일시적 관심에 따라 수행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배후에 그런 조치가 시행되기까지 19세기 중엽 이래 슐레겔, 브룬호퍼, 하우스호퍼, 발터 뷔스트 등 독일 학자들이 상당 기간 연구한 이론적 결과물들이 그러한 실행을 뒷받침해 주었고, 또 이미 아리안종의 우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배경에 히믈러의 개인적 관심사가 더해져 당시 일반인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티벳 탐험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1938-1939년에 걸쳐 수행된 이 탐험은 특히 히믈러가 추진한 ‘선조의 유산’ 정책에 따라 아리안종의 기원을 티벳에서 찾으려고 과학자 등이 포함된 SS 대원들을 그곳으로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목적과 결과가 너무나 단순하게 요약 정리되어 있는 이 탐험은 본 연구자의 견해로는 그렇게 단순했을 리가 없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나열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조사 분석하여 그 탐험의 실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인은 히믈러가 그 정책을 시행하는데 동기를 부여한 학자들의 이론, 특히 ‘인도’를 시발점으로 해서 인도-아리안과 독일인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리고 그런 이를 근거 삼아 아돌프 히틀러가 인도의 ‘스와스티카’(Swastika, 만자(卍字) 모양) 문양을 나치 독일의 상징으로 고착시키는 과정을 고찰하고, 이어 히믈러가 이러한 상징물에서 얻은 영감에 착안해 독자적인 SS 상징물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히틀러와는 달리 자신의 독자적인 ‘게르만 제국’을 구상하해 가는 과정을 연구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구상으로 그는 ‘미래’ 게르만 제국의 수도가 될 베벨스부르크(Wewelsburg) 성을 구축하고, 그 실행의 일환으로 독자적으로 SS 대원들을 티벳 탐험을 위해 파견하는데, 아리안종의 기원을 찾으려던 그가 인도가 아닌 티벳으로 탐험대를 파견한 것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나치의 티벳 탐험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1회가 아니라, 사실은 최소한 2회에 걸쳐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목적과 결과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공개되어 있지 않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따라서 본인은 그러한 요인들을 좀더 심층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나치 독일이 아시아, 그 중에서도 티벳에 대해 가졌던 인종주의적,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탐험 대상이 된 티벳 정부와 일반 티벳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으며 그 탐험 연구가 지닌 내막과 그것이 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자의 생각으로 이 탐험은 과거지사로 끝난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티벳 탐험의 연구를 통해서 그 탐험의 이유와 드러나는 양상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 티벳 탐험에서 나타난 독일인들의 아리안 우월주의 사상과 그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은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과 더불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을 뿐 현재에도 만약 다시 상황이 바뀐다면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는 심층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금년 4-5월에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나타난 신나치주의, 신인종주의 형태이다. 따라서 이 연구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아리안주의의 실체와 그 변화 형태, 전망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이 문제와 관련해서 티벳인과 같은 동양인인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과 차후 대처할 자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인의 이번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독일이 과거 나치 시대에 갖고 있던 인종주의의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유대주의적인 특성을 넘어서고 있으며, 특히 히틀러의 명에 따라 그 정책을 담당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했던 히믈러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 복잡하게 이중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연구를 통해서 나치 시대의 인종주의 정책이 아시아 지역, 특히 티벳과 그 인근의 인도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에 대한 인종주의 정책과는 사뭇 다른 식으로 전개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과거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를 통해서 히틀러와는 사뭇 다르게 이중적인 ‘아리안 우월주의’ 정책을 시행한 히믈러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당시 정책 실행가들의 내면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대해서 좀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연구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첫째 지금까지 독일의 인종주의 연구에 종사해 온 학자들이나 실무자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최근의 급변하는 국제상황 속에서 외형적으로는 세계화와 상호문화 존중이라는 기치 하에 각국이 상호 존중하며 유대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세계화로 인해 격화된 경쟁과 자주 반복되는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오히려 국가들 간의 불신과 반목은 더 깊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불신의 한 예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보수주의와 우익 포퓰리즘(Rechtspopulismus)이다. 따라서 인종주의에 입각해서 수행된 나치의 티벳 탐험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우리 아시아인으로서는 앞으로 더욱 심도 있게 연구 비교하고 비판하면서 알아가야 할 분야이다. 이 탐험의 내막은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단순히 티벳인들을 탐험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구체적인 상황이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차후에 이 분야에 대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본인이 대학에서 강의해 온 독일문화와 관련해서 학생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근래에 대학생들은 독일문화 분야에서 예전과 같이 문학이나 어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 사회, 정치 분야에서도 다뤄지는 다양한 현실적, 비현실적인 주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인의 연구 주제는 현재 독일을 위시한 유럽 내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인종주의의 실상을 단일한 측면에서가 아니라 좀더 복합적이고 심층인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점에서 더 풍부한 시사성을 갖는다. 따라서 본인은 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대학 강단에서 그 연구 주제와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키워가도록 고무하고, 그들의 생각을 본인의 연구에도 적극 활용할 것이다. 또 장차 본인은 이 연구내용을 확대 심화시켜 일반인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서적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왜냐하면 본인의 연구주제는 학문적 가치뿐 아니라 높은 시사성과 흥미를 지닌 현실적인 주제라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반인도 충분히 관심을 갖고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치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 문제를 현재의 네오나치즘과 연관시켜 문화사적 관점에서 계속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본인의 연구 결과는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일문화에 대한 지식의 범위를 유럽지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외연을 아시아까지 더 넓혀 심화시킴으로써 우리에게 독일의 이미지는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며, 향후 우리와 같은 동양인들이 독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상황에 대하여 좀더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판단하고 대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연구목적:
    본인은 과거 나치 시대에 아리안 우월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SS의 수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구상한 ‘선조(先祖)의 유산’ 정책이 구체적으로 ‘티벳 탐험’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목적, 내용, 결과에 대하여 연구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문화권에서 사라진 듯 보였던 ‘아리안 우월주의’가 현재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다시 등장하고 있어서, 이 연구를 통해 그 근본적인 원인과 특성을 좀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히믈러는 히틀러의 인종주의 정책을 가장 철저하게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히틀러의 정책과 차별화하여 자신의 인종주의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조사 분석하고 당시 나치의 아리안 우월주의의 특성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연구내용:
    본인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수행하고자 한다: 첫째, ‘아리안 우월주의’ 사상에 영향을 준 인도-아리안 문화를 연구한 학자들, 특히 하우스호퍼, 발터 뷔스트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나치 독일의 상징으로 채택된 인도-아리안의 상징인 ‘스와스티카’에 대해서, 그리고 앞의 이론이 히믈러의 ‘선조의 유산’ 정책에 미친 영향과 위의 사상과 관련해 히믈러와 히틀러 간에 어떤 견해 차이가 있었는지 분석할 것이다. 결국 히물러는 독자적으로 순수한 아리안종의 기원을 찾기 위해 1938년에 ‘티벳 탐험대’를 파견하는데, 그 과정과 실제 목적과 내용, 그리고 왜 인도가 아닌 티벳으로 탐험대를 파견했는지, 상징물 ‘스와스티카’와 티벳의 관련성, 그리고 나치의 탐험에 대하여 당시 티벳 정부가 보인 반응, 당시 어린 달라이 라마를 대신했던 섭정의 권한과 나치 탐험대와의 커넥션 여부, 그리고 탐험 이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인들의 반응도 연구할 것이다. 그 탐험의 결과와 자료들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와 거기에 어떤 사실이 숨겨진 것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에 대해서도 조사할 것이다.
    둘째, 1939년 여름에 티벳 접경 지역에 있는 파키스탄의 낭가 파르밧(Nanga Parbat)에 파견된 등정 탐험대에 대해서도 그 동기와 이유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아 의문이 드는데, 이것을 히믈러의 계획과 연관시켜서 분석할 것이다. 본 연구에 필요하면 앞서 1935년에 진행된 ‘힌두쿠시 탐험’도 함께 고찰하여 세 탐험이 ‘아리안 우월주의’ 정책과 상호 연관성이 있을 경우 그 면모를 밝혀내고자 한다. 현재 독일은 외형적으로는 과거의 나치시대의 모든 그룻된 이데올로기와 행적들을 반성하고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철십자) 문양의 사용도 금지해 왔으나, 최근에는 그것이 고대 인도 지역에서 발생하여 인도 아리아인들에게 독특한 상징성을 띠면서 전승되어왔다는 주장과 함께 그 금지를 해지하려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그러한 해석이 장차 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해 전개되어갈지는 미지수이므로,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고찰하고 그 상황의 변화 가능성에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다.
    셋째, 실제로 근래 세계화 정책의 결과 드러나는 모순들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내에서 우익 포퓰리즘(Rechtspopulismus)을 불러오고 있는데, 본인은 이러한 상황들이 앞서의 나치 정책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 맥락에서 고찰하고 창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조사 분석하고 차후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전망하면서 연구 내용의 깊이와 범위를 더해갈 것이다. 이 연구 주제는 과거 독일이 아시아와 가졌던 관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서 시사성을 띠므로, 본인은 연구를 진행하면서 과거 및 최신의 주요 자료들(신문, 인터넷 뉴스, 학술지, 동영상 등)을 계속 참고자료로 활용하여 연구의 시사성을 더 부각시키고, 독일 도서관, 박물관 웹사이트 등을 찾아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이 있으면 역시 찾아서 연구에 활용할 것이다. 또 영미권의 자료들도 참고하여 다양한 시각들을 고찰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접근 방법을 모색하고, 다른 전문분야의 발표나 세미나 자료도 함께 분석할 것이다. 이 주제는 단지 독일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타 학문분야에서도 높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야이므로, 기회가 되면 그 분야의 학자들과도 만나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할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를 진실하고 심도 있게 진행하기 위해서 본 연구자는 주요 세부사항들을 신중하게 읽고 분석 첨삭하면서 연구 내용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창의성적으로 구성해 나갈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세기 영국의 언어학자 윌리엄 존스(W. Jones)에 의해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게르만어와 유사성이 있음이 알려진 후로, 산스크리트어에서 ‘고귀한’이란 뜻으로 쓰였던 아리안’(Aryans)이라는 말이 독일에 알려지면서 줄곧 논쟁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에 인도의 신화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산스크리트어가 게르만어의 ‘원어’(原語)라는 가정에서 ‘아리안족’이 살던 곳을 인도게르만인의 ‘원향’(原郷)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 때부터 원향 이론은 학자들마다 달라져 일부 학자는 그 원향을 게르만인의 원향을 인도 북서부 펀잡 및 카시미르 지방으로 보았고, 일부는 고대 이란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에서 힌두쿠시 산맥으로까지 이어지는 곳을 원향으로 보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카스피해에 면한 아르메니아 지역, 또는 중앙아시아의 서쪽, 아니면 러시아의 볼가(Wolga) 강 유역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인도게르만인에게 북유럽인의 흰 피부, 금발머리, 파란 눈의 특징을 덧붙이면서 아리안족의 원향을 북독일과 스칸디나비아라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이론들과 대립하는 이론도 나왔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학자인 고비노(Gobineau)가 과거 인도에 침입해 들어온 아리아인들도 인종적으로 본래 피부가 희고, 금발에 키가 크고 아름다웠다고 주장하고, 인종들 가운데 백인종이 가장 우수하며, 그 중에서도 아리안족이, 또 그 중에서도 ‘아리안 독일인’이 강력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 이론은 독일에 퍼지면서 ‘아리안 우월주의’가 생겨났다. 독일 나치 시대에 와서 위의 이론들은 인종주의로 발전했고, 나치의 지도자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이러한 ‘원향’ 관련 이론들은 히틀러가 라첼(Ratzel)의 ‘레벤스라움’(독어: Lebensraum: 생활공간) 이론의 영향을 받아 독일 인구의 분산을 목적으로 생활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독일어권 밖으로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히틀러는 휘하의 학자였던 하우스호퍼(K. Haushofer)는 이러한 생존권 보장을 위해 독일인은 군사적인 확장 정책을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아리안족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북인도와 이란의 종교, 티벳과 관련된 신비주의, 즉 티벳의 지하의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가진 소위 ‘아가르타’(Agharta) 왕국에 관한 전설 등을 나치 지도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히틀러는 비록 아리안족인 독일인의 우월성을 믿고 그들의 세력이 뻗어나가야 한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 기원을 찾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히틀러 친위대(독어: Schutzstaffel, 약칭 SS)의 수장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그런 이론에 관심을 보이면서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아리안의 의미와 그 기원지를 찾고 이를 현실화하려 했다. 나치 제국의 제2인자로까지 부상한 그는 독일인을 “순수한” 게르만인으로 개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데다 위에서 설명한 티벳에서 아리아인의 기원을 찾는 데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히믈러는 1935년에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 연구에 중점을 두고, 아리안족의 실체를 밝히고 그들의 원형을 실제로 찾기 위해 고고학적 발굴 작업도 하는 ‘선조의 유산’(Ahnenerbe)이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38년 4월에 티벳탐험대를 파견했다. 1938~1939년은 나치 정권에서 히믈러의 지위가 한층 고조되고 그의 게르만 의식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총통 히틀러가 동유럽 지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SS뿐 아니라 비밀 게슈타포 경찰까지 손에 쥐고 있어 국내외에 많은 정보망이 있던 히믈러는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히틀러의 의도를 꺾을 수 없었으므로, 히틀러와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모색한 것으로 보이며, 또 그 과정에서 ‘게르만 제국’의 실현을 위한 행동에 나설 생각을 굳혀갔다. 히믈러는 자신이 생각하는 독일인의 ‘순수’하고 ‘고귀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데 동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내심 총통 히틀러와의 차별화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였고, 그 중 하나가 티벳탐험대 파견이었다. 탐험대 대장으로 생물학자이자 사냥꾼인 셰퍼(E, Schäfer), 인류학자인 베거(Dr. B. Beger), 지리학자인 비너르트(K. Wienert), 곤충학자이자 카메라맨인 크라우제(E. Krause), 기술자이자 캐러번 인솔자인 게르(E. Geer)가 참가했는데, 이들은 모두 히믈러의 SS 대원들이었다. 탐험대는 1938년 4월에 독일에서 출발했으나, 티벳을 간접 지배하는 인도 주재 영국 당국의 방해로 티벳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1939년 1월에 어렵게 티벳의 수도 라사(Lhasa)에 도착했고 그 해 8월에 독일로 귀환했다. 그들의 탐험 목적은 표면상 “아리안종의 기원과 우월함에 대한 학문적인 증거들”을 수집하고 티벳의 자연을 탐험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티벳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데다 역시 ‘생활공간으로서의 티벳고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셰퍼는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티벳 남부의 작은 시킴(Sikkim) 왕국을 거쳐 티벳으로 들어가자 티벳 정부의 각료들과 긴밀하게 접촉을 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거주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충분히 얻고 또 체류하는 동안 티벳 주민들에게서 독일이 전쟁을 치를 경우에 필요할 전시 경제에 적합한 곡물종자, 식물의 씨앗 등을 구했다. 특히 그 탐험대 가운데 인류학자인 베거는 팀원들 중 가장 인종주의 성격이 강하고 ‘북부 인종’에 관한 이론을 중앙아시아와 티벳에 적응하는 데 대해 지지했으므로, 아리안의 기원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열심히 티벳인들의 신체적 모양과 특징들을 조사하고, 300여 명의 티벳인들의 두개골의 둘레를 재고 그 모형 석고를 뜨는 등의 방식으로 자료들을 모았다. 나중에 귀국한 그는 티벳인들이 아마 “몽골족과 유럽 인종의 중간” 인종이라고 진단하고, 그들에게서 나약한 불교의 영향만 퇴치한다면 독일인에게 적합한 “파트너 민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밝혔다. 그들은 티벳에서 풍부한 수확물들을 갖고 독일로 귀환했는데, 그 때가 히틀러가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러자 영국은 곧바로 1939년 9월 3일에 대 독일전을 선포했다. 그들이 티벳에서 가져온 수확물은 3,500 종의 박제된 새들, 2,000여 종의 알(卵), 400 종의 포유동물, 파충류, 양서류의 두개골과 가죽, 수천 종의 나비와 메뚜기, 2,000 종의 민속학 대상들, 광물, 지도들, 수백 종의 곡물과 식물 종자들, 그리고 4만여 장의 흑백사진들이었다. 그 중 7천여 종이 오늘날 가터스레벤(Gatersleben) 시의 ‘라이프니츠 식물유전학 및 곡물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티벳탐험의 의미는 그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도 학자들이나 문인들에 의해 오컬티즘에 사로 잡혀 오직 히말라야 산맥 아래에 숨겨진 샴발라와 아가르티를 찾으려는 임무에 집중했고 대원들이 모험가들에 의한 트로피 헌팅(trophy hunting: 재미를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티벳탐험의 내막을 좀더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점이 있는데, 보통 단순히 히믈러의 개인적 취향에 맞춰 아리안종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탐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나 결과보고서가 공개되고 있지 않은데다, 북유럽인들과는 외모가 전혀 달라 보이는 벳인들에게서 순수한 아리안의 흔적을 찾을 거라고 가정하고 떠났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면에 좀더 객관적으로 고찰하면, 겉으로는 히믈러의 오컬티즘적인 취향에서 시행된 것처럼 표명했으나 사실은 그 밑에 정치적, 군사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으리라 추측 된다. 그것은 셰퍼가 이끈 티벳탐험이 종료된 후에도 히믈러는 오히려 그때부터 또 다시 티벳탐험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그때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독일은 군비를 갖추고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던 때인데도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일견 아무 이해관계가 없을 듯한 티벳에 계속 뜨거운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그것으로 보아 그의 티벳탐험 프로젝트는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인 전략에서, 그것도 티벳을 움직여 영국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수행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히믈러와 총통 히틀러의 관계 및 영국, 러시아와의 복잡한 국제 관계를 고려하면 이해된다.
    히틀러는 사실 히믈러를 중심으로 게르만 문화를 재조명하고 미화하는 작업을 겉으로 적극 방해하지는 않았으나 무관심하거나 일부 거부감을 보였다. 히틀러는 대전을 일으키기 전후로 아시아의 패자인 영국에게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영국이 인도 지배에 힘을 쏟는 동안 동유럽과 러시아 쪽으로 뻗어 아시아까지 넘보는 땅을 확보하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나치 정권에서 1939년에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로 탐험대를 보내는 데에 히틀러가 적극 나선 것도 단지 그 산을 등반하는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정찰대를 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히틀러는 처음에는 러시아가 인도를 위협하는 적대세력으로 보고, 이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이를 기반으로 독일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유리할 거라고 믿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으나 영국 측은 독일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곧바로 대 독일전을 선포했다. 그러자 독일은 이번에는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 그처럼 긴박한 전쟁 분위기 상황에서 SS 수장인 히믈러가 한가하게 오컬티즘의 취향에서 재차 티벳탐험을 계획했을 개연성은 매우 적다. 게다가 이번에는 탐험대를 육로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티벳과 시킴을 움직여 영국 세력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 소련에 대한 정책이 자꾸 바뀌는 상황에서 히믈러는 자신의 입장이 불리한 것을 느끼고 독자적으로 티벳탐험을 통한 다른 전략을 쓰거나 돌파구를 마련할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2차 티벳탐험은 히틀러의 비협조와 정세의 불리한 변화로 인해 무산되었다.
    반면에 히틀러는 늦어도 1939년 4월경에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산으로 탐험대를 파견했다. 거기에는 훗날 <티벳에서의 7년>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인 하인리히 하러도 참가했다. 그 탐험대도 산 정상 등반은 하지 못하고 1939년 8월 말에 귀국하려다 영국군에게 잡혀 인도의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바람에 그 탐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러나 전후에 티벳탐험이나 낭가파르바트 탐험에 대한 국가적인 공식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임무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나치 독일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던 동방의 영토에 대한 꿈은 영국을 적으로 돌리고 또 소련을 침공했다가 패함으로써 무산되고 히말라야 지역에 대한 세력 확보도 실패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 영문

  • This study researches how the 1938-1939 German Expedition to Tibet was performed and what its results were. In order to understand it better, it is necessary to view briefly its background. Since the english philologist Sir William Jones suggested in the 18th century that the Sanskrit, an ancient indian language, hat a common root with Greek, Latin and further with German language, the Germans were interested in the Sanskrit and indian culture, religions and people. And as it was known that the Sanskrit word ‘Aryans’ meant ‘noble people’ in India and Iran, they were fascinated by this word and tried to investigate who really the ancient Aryans were and where they were from. The Germans wanted to believe that the old ‘Aryans’ should be their ancestors and formalized the presumption that the origin area of the speakers of a proto-european language should be the original homeland (also ‘Urheimat’ in German language) of the Germans. Since then a lot of German scholars began to assume the right homeland and debate about it. Some scholars suggested that the north west district of India, e.g. Punjab or Kashmir as the cradle of Aryan culture, and some others insisted that the district from Pamir to Hindukush mountains are the homeland of Aryan people. There were also scholars who believed that the homeland of the Aryans are Armenia or the west districts of central Asia, or the Wolga river valley in Russia.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ry, Arthur de Gobineau, the French scholar supposed in his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 that ‘Aryan’ corresponded to the suggested prehistoric Indo-European culture. And he believed that there were three basic races, namely white, yellow and black, and that the white race was superior to other races. Further he insisted that the Northern European ‘Aryans’ had remained “racially pure” and so they were the ideal “master race” to which the Germans also belong.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many linguists and anthropologists argued that the ‘Aryans’ had originated somewhere in northern Europe, perhaps in Scandinavia and might be identified by the Nordic characteristics of blond hair, blue eyes and tall stature.
    These various theories about the ‘Aryans’ and their homeland were mixed or in conflict with each other. But with the time there emerged the theory of ‘Arian supremacy’ and it developed into the racism. In the era of the German Nazi regime these theories were ardently accepted by the Nazi leaders such as Adolf Hitler and Heinrich Himmler. Hitler was formerly influenced by the ‘Lebensraum’(living space) theory of the german scholar Ratzel. Ratzel argued that the development of a people into a society was primarily influenced by their geographic situation, and that a society who want to be successfully adapted to one geographic territory should expand the boundaries of their nation into another territory. And according to him Germany should acquire overseas colonies to which surplus Germans might be able to emigrate.
    K. Haushofer who served as the Geopolitician in the Nazi regime was a close person to Hitler. Haushofer was also a persuasive advocate of the theory of living space that had been a prominent strand of German imperial ideology sinc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aushofer developed Geopolitik and infuenced the policy of Hitler and advised him to take an expension policy of the military forces. The German should recolonize the Slav lands and reunite the ethnic German populations of eastern Europe and Russia. Moreover he introduced the theories of the Thule society to the nazi leaders. According to it the mythical land of Hyperborea-Thule, which might be identified today with Iceland and Greenland, was the remnants of so called lost kingdom of ‘Atlantis’ and the descendants of the inhabitants of this land, who were the people of Thule had survived to  become a subterranean super-race. This race should be ‘Aryans’ and they might live nowadays in the underground of Tibet. And the place might be the kingdom of ‘Agharta’ with high civilization and secret super power ‘vril’.
    H. Himmler, who was a very powerful SS leader in the Nazi regime, was deeply influenced by such theories and believed in the racial superiority of the 'Aryan' people and their origin. He ordered in 1935 to organize ‘SS Ahnenerbe’(SS Ancestral Heritage Society) as an institute under SS in order to investigate the german prehistory and evacuate the archeological remains. Further he sent the ‘German Tibet-Expedition Ernst Schaefer’ in April 1938. The ostensible primary aim of this expedition was an “holistic creation of a complete biological record of Tibet alongside a synthesis of inter-relating natural sciences with regard to geography, cartography, geology, earth magnetics, climate, plants, animals and mankind.” The expedition was performed from May 1938 to August 1939, led by German zoologist and SS officer Ernst Schäfer. Schäfer himself had already travelled through parts of Asia, mainly India and China, and he was well aware of these districts. But the expedition group had difficulties with the visa issuance because of the obstructive behavior of the British authorities in India. In those days not only India was colonized by the British Empire, but also Tibet was indirectly reigned by the Empire. Therefore it was not easy for the group to enter the Tibet territory, so that they got first the entry visa into Sikkim, the small country southeast of Tibet, and from there they travelled through the vallies of the Himalayan mountains heading north to Tibet. They finally arrived in Lhasa, the capital city of Tibet in January 1939 and returned to Germany at the End of August of the same year. They were welcome everywhere in Tibet and provided with all lots of things they needed for their trip and sojourn. In Lhasa itself, the Tibet authorities and also the regent of the country welcomed them. The group got into close touch with government officials and other people who were in position to help them in performing their aims there. The official aims of the expedition were the research on the landforms, climate, geography, and culture of the country. But it is presumed that one of the expedition's real purposes was to determine whether Tibet was the cradle of the "Aryan race", and to take cranial measurements and to make facial casts of local people by anthropologist Bruno Beger. And Schäfer, who was formerly influenced by the ‘Lebensraum’ theory and was eager to find out the possibilities of the realization of the theory. He was busy with collecting religious and other important texts of the country including alleged documents regarding the ‘Aryan’ race. The group was permitted to photograph and film the region. They spent two months in Lhasa, collecting information on agriculture, culture, and religion and undertook research in the Tibetan mountains. The Germans collected thousands of artifacts, a huge quantity of plants, in particular hundreds of varieties of barley, wheat, oats, including live specimens. But it is presumed that the chief task of the expedition was of a political and military nature rather than the solution of scientific questions. It was more important for them to investigate the possibility of establishing the region of Tibetan and german soldiers in order to attack the British troops in India. Further the expedition's aims was to prepare maps and survey passes so that, if necessary, Tibet might be a staging ground for guerrilla assaults on British India. This assumption may be verified by the fact that after returning of the expedition group to Germany, Schäfer had a meeting with H. Himmler in which they discussed the plans to launch another expedition to Tibet in the next year. The idea was to win Tibet over to the German side and make it a partner land for the advantage of Germany. But this project never took off, partly because of the disapproval of A. Hitler and partly because of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In 1943, Schäfer was given instead his own institute within the ‘Ahnenerbe’. with the name of ‘the Sven Hedin Institute for Inner Asian Research’ after a Swedish explorer who visited Tibet in 1907 and was welcome as a nationalsocialist by Adolf Hitler in Germany. In 1943 Schäfer also let release the film ’Geheimnis Tibet’(Secret of Tibet) which was put together from the various scenes from Tibet. It premiered on January 16 in Munich. But H. Himmler was originally against the release of this film, because he had wanted to keep the process and the contents of the Tibet expedition for his own interest. Beger worked from 1943 at the Auschwitz detention centre to provide the Nazi physician with a selection of diverse ethnic types from Auschwitz in order to serve notorious racial experiments.
    H. Himmler was the chief of SS and GESTAPO(the secret state police) and had a lot of reliable information sources in and out of the land. Therefore he was well aware of the fact, that, in case Germany starts a war, there was no chance that Germany would win. But he was not in position to keep Hitler, the number one of the Nazi state, from doing it. So Himmler might have begun to seek his own way in another direction to realize his dream, the “Great German kingdom.” He knew the importance of Asia and selected Tibet as a territory that might be useful for the future of Germany.

    But in the different way from the Schäfer expedition to Tibet in 1938, another expedition group, namely the group of the ‘Nanga Parbat Expedition’ was sent in April 1939 to the Kashimir district northwest of India. The expedition lasted until August 1939. Hitler seems to have engaged himself in this project and met personally the men of the group who climbed Eiger mountain in Switzerland in 1938 and returned to Germany. In May 1939, Heinrich Harrer, the author of the autobiography <Beyond the Seven Years in Tibet>(1952) which made him world-famous, was selected by the German Himalayan Foundation to take part in this expedition under the leadership of P. Aufschnaiter. The aim of the this expedition was proclaimed officially as a mountaineering expedition, namly the expedition to the Nanga Parbat, one of the highest mountains which lies at the west end of Himalayan mountains(nowadays in Pakistan). Their goal was to climb the Nanga Parbat mountain, but it was not realized. In August 1939, the group left for Karachi, where they waited for a vessel which was supposed to recover them. But the group were captured by British troops in India and jailed in a camp. Harrer and Aufschnaiter escaped, and although they were later recaptured, they escaped again. They met lots of difficulties in wandering through the Himlayan mountains but they arrived in Tibet in May 17, 1944, and ant the end Harrer was introduced to the 14th Dalai Lama. He become intimate with the young Dalai Lama, advised him in many ways and informed him of the European culture. Harrer remained in Tibet until 1951 and left the land, while Aufschnaiter remained there to work further as an advisor and technician for Tibet. At that time the Second World War had already ended and there were no more Nazi regime or Hitler. And the real aim of the expedition, namly of that Hitler was never revealed in details after the war. But it might be presumed that Hitler who never had been a real occultist but a sincere realist had wanted to seek proper routes and informations around the western Himalayan district which was not far from India and from Central Asia which was then the colony of Soviet Union. Hitler must have wanted to hold Russia, and when necessary also British India, in check. But in the end both of the two expeditions, one to Tibet and the other to Nanga Parbat, had no success because of the dual and vague policies of Hitler toward Britain and Russia. Hitler showed a favorable attitude to the Britain as an Aryan race, but as he started the war, Britain turned back to Germany and declared war against it, too. And Hitler attacked in 1941 also Russia with the so called ‘Operation Barbarossa’, which sank Germany into a pit and Germany failed the war and collapsed at the end.
    When reviewed, the original interest and eager of German scholars for the Aryan language, culture and people of ancient times was of gut intention. But as it was involved later in Nazi policies, it was spoiled quickly in the theory of racial superiority of the ‘Aryan’ people. The Nazi leaders Hitler and Himmler were also interested in the theory, but they misunderstood not only the real value of theory but also the culture and people of the Asian lands where the ancient Aryans might have immigrated from. They only wanted to take political and strategic advantages from the lands and so dispatched the expedition groups which had to end in failure.
    I hope that this study would help people who are engaged in other academic areas too, including scholars and politicians that are interested in the Eurasian situations and politics. I will also make efforts to continue my study in the future. And at the university where I have been lecturing German culture since many years, I would further inform my students who are also very much interested in the German history and culture and extend their attention and knowledge. When I had opportunity, I would let publish this theme as a book also for normal reade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과거 독일의 나치 시대에 행해진 ‘아리안 우월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SS(친위대) 수장(首長) 하인리히 히믈러가 설립한 기구인 ‘선조(先祖)의 유산’(Ahnenerbe)이 수행한 ‘티벳탐험’을 중심으로 나치가 행한 동방 정책에 대해 분석했다. 히믈러가 1938년에 시행한 이 탐험은 그가 SS 대원들을 먼 아시아의 티벳으로 파견한 것인데, 이를 두고 그가 오컬티즘(Occultism) 사상에 심취해서 ‘아리안’족의 기원과 게르만인의 ‘원향’으로 추정한, 소위 사라진 ‘아틀란티스’(Atlantis)를 찾으려고 보낸 것이라고 그 가치를 폄하하는 시각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오히려 그 배후에 나치의 동방으로의 영토 확장에 대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19세기부터 독일에서 인도(India)의 산스크리트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어 생긴 ‘아리안’ 사상과 그 기원이 인도 북부지역이라는 인식으로 확산되어 게르만인의 ‘원향’(原鄕), 독어: Urheimat)을 그곳으로 보고 거기에서 그들의 조상인 아리안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각이 나치 시대에 성행했고, 그런 과정에서 히믈러의 티벳탐험이 진행되었다. 물론 히믈러에게 그런 원향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는 그가 히틀러와는 다른 의도에서 추구한 ‘대게르만’ 제국 건설에 대한 집념이 그 티벳탐험을 추진시킨 실제 이유로 보인다. 티벳탐험과 비슷한 때에 추진되어 1939년에 시행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산 탐험은 총통 히틀러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는 도중에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성과 없이 끝났으나, 히틀러 역시 동방에 대한 진출을 계획하고서 히말라야 지역을 탐색하기 위해 그 탐험대를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위의 두 나치 지도자들은 비록 ‘아리안 우월주의’ 사상에 젖어 있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그 세부적인 면에서는 서로 차이를 보여서 외연상 각각 다른 탐험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부터 아리안 사상과 또 일부 오컬티즘에 취해 있던 히믈러는 1934년부터 중세의 오래된 베벨스부르크(Wewelsburg) 성(城)을 인수해 이곳을 게르만의 성지로 삼아 SS 대원들을 거느리고 독일인의 선조를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의 주위에는 인도 사상에 심취한 학자도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히믈러는 인도 문화와 비슷한 문화권인 티벳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반해 총통 히틀러는 훨씬 더 현실적이어서 인도 사상을 폄하하고 동방인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히믈러의 티벳탐험에 대해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았고, 대신 히말라야 지역에 있으면서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길목인 낭가파르바트 지역을 탐사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히믈러는 티벳탐험 이후에 티벳에 SS정예군을 보내 티벳 군대를 양성해서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군과 대적할 생각이었다면, 히틀러는 처음에는 영국과 대적하기보다는 오히려 소련과 대적해 동유럽과 러시아를 지나 아시아까지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인한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전세가 독일에 불리해지면서 그들이 의도했던 계획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히믈러의 ‘선조의 유산’ 정책이 구체적으로 1938년에 ‘티벳탐험’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과 목적, 결과에 대하여 연구하되, 1939년에 시행된 낭가파르바트탐험의 계획, 진행과정, 의미, 그리고 그 두 탐험의 실제로 숨겨진 의도 등을 함께 비교하며 분석했고, 그 탐험들에 참여한 중요한 대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고찰했다. 특히 티벳에서는 탐험대장인 셰퍼와 인류학자인 베거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셰퍼는 독일이 전쟁을 치를 경우에 필요할 전시 경제에 적합한 곡물종자, 식물 종류, 씨앗 등을 많이 수집했고, 베거는 ‘아리안 인종’ 관련 이론을 티벳에 적응하면서 그 기원을 찾으려고 티벳인들의 두개골을 측정하고 그 모형을 많이 수집했다. 특히 베거의 경우 뒤에 귀국하여 티벳인들이 아마 “몽골족과 유럽 인종의 중간” 인종이라고 진단하고 그들을 독일인의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그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943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주로 유대인을 상대로 악명 높은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의 티벳탐험은 히믈러의 영토에 대한 욕망과 인종주의적은 의도가 함께 작용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로 그 자세한 내용과 기록은 전후에 사라지고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는 미미하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독일문화권에서 인종주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현재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이 있을 때 다시 고개를 드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연구를 통해 그 근본적인 배경과 특성을 좀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에서는 나치 시대에 ‘아리안’ 사상이 ‘원향’ 추구의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SS 수장이던 히믈러에 의해 그것이 어떤 정책으로 수행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특히 나치의 최고 지도자들은 ‘원향’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제각각 자기의 신념이나 취향에 따라 수용하면서 많은 이견과 대립이 있었다. 히믈러 역시 제국총통 히틀러와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소위 ‘아리안 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은 가졌으나 인도나 티벳은 물론 아시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목적한 것을 시행하는 데 있어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인의 연구는 히믈러가 1938년에 파견한 티벳탐험대와, 1939년에 히틀러가 파견한 낭가파르바트탐험대의 행적을 서로 비교 분석하여 그 문제점을 고찰했다. 즉 그 탐험대들이 표명한 탐험목적과 실제로 수행한 임무들 간에 드러나는 모순이나 괴리를 볼 때, 위의 두 나치 지도자에게는 히말라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모색하고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기회를 엿보고 군사 행동으로까지 나서려던 것이 실제 계획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의도가 SS 수장 히믈러에게서는 ‘대게르만제국’ 건설의 의도로 나타나고, 이를 위해 티벳을 일종의 파트너 국가로 삼을 수 있다는 탐험대원의 보고까지 그는 나중에 받게 된다. 그보다 더 현실적이면서 독일의 운명을 실제로 손에 쥐고 있던 히틀러는 자신의 의도를 ‘생활공간’의 확보라는 이념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의 모순되는 이데올로기, 아시아에 대한 경멸과 호의라는 모순적인 태도, 영국과 러시아에 대한 이중적인 전략으로 인해 결국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 모두를 적으로 돌려 아시아로 진출할 교두보를 모두 잃으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나치의 ‘아리안 우월주의’와 인종주의 사상은 나치의 대 아시아 정책의 바로미터가 되어주고 1938년의 티벳탐험과 1939년의 낭가파르바트탐험을 수행하게 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리안’의 개념을 인도와 연결시키는 사고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사비트리 데비(Savitri Devi) 라는 여성을 들 수 있다. 본래 프랑스 출신으로 인도 사상에 심취해 자기 이름을 인도식으로 개명한 그녀는 1953년에 자신을 “히틀러의 여사제”라고 부르면서 그를 인도 힌두교의 크리슈나 신과 비시누 신에 비유했다. 그녀는 아리안종의 의지의 힘과 영웅적인 면은 세대를 거듭해 이어질 거라고 주장하면서 네오나치즘의 선봉자가 되었다. 독일의 인종주의는 오늘날에는 비록 인도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던 시작되었던 인종주의와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으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나치 시대까지는 우월한 종족이 지배하는 논리의 인종주의였다면, 오늘날에는 독일어권에서 정치적, 종교적 불안으로 인해 유입되는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면서 내부적으로 서서히 다시 게르만인들의 결속과 방어를 다짐하는 극우주의가 확대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독일에서는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의 활약이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과거 아돌프 히틀러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렸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쇠네러(Georg R. von Schönerer)가 주장한 범게르만주의 운동의 성향을 보이는 당의 활동이며, 생물학적-유전적인 차이를 가진 외국인들이나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혐오감이다. 겉으로는 전 세계의 문화들이 개방된 현실에서, 문화가 다른 민족들에 대해 갖는 배타성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곳이 유럽의 중심인 독일 내지 오스트리아 지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19~20세기 나치 시대까지 독일을 휩쓸었던 ‘아리안’ 사상의 광풍은 21세기에 들어왔어도 언제 또 위기를 촉발할 시한폭탄처럼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애초에 너무 많은 학자들 간에 ‘아리안’이라는 자못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지나친 연구의 열의가 결국 독일 내에서 서로 상반되고 때로는 대적하기도 하는 많은 이론 분파들을 만들어냈고, 이는 아시아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바뀌고 왜곡되면서 비극을 낳았는데, 그러한 모순이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새로운 시각에서 진행된 이 연구 결과는 지금까지 독일의 인종주의 연구에 종사해 온 학자들이나 실무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그들의 연구에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또한 본인이 이 연구 결과를 대학에서 강의 자료로 활용하고 학생들과의 토론 주제로 다루어 그들이 독일문화와 관련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키워가도록 고무하고, 기회가 되면 이 연구내용을 서적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 색인어
  • ‘선조의 유산’, 아리안종, ‘레벤스라움’(생활공간), 하인리히 히믈러, 친위대 이데올로기, 스와스티카(만자, 卍字), 철십자(하켄크로이츠), 대게르만, 티벳, 라사, 달라이 라마, 티벳 불교, 나치의 탐험, 상징, 인도, 에른스트 셰퍼, 영국 관계, 러시아, 낭가파르바트, 인도- 아리안 신화, 네오나치즘, 히말라야, 히틀러, 오컬티즘(비교주의), 베벨스부르크, 하인리히 하러, 영국령 인도, 브룬호퍼, 하우스호퍼, 발터 뷔스트, 툴레 협회, 아틀란티스, 아가르타, 샹그릴라, 티벳에서의 7년, 수바스 찬드라 보스, 사비트리 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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