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사찰의 물품생산과 승려의 賦役
-경상도 星州의 安峰寺를 중심으로- Temple manufacture in the 16th Century and Statute Labor of Monks-Focusing on Anbongsa Temple, Seongju, Gyeongsang do
지금까지 조선시대 불교사연구는 불교탄압이라는 피해의식이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란 중에 활약한 승장(僧將)과 불법(佛法)과 학문을 계승한 학승(學僧)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승려들의 실제 모습은 거의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 ...
지금까지 조선시대 불교사연구는 불교탄압이라는 피해의식이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란 중에 활약한 승장(僧將)과 불법(佛法)과 학문을 계승한 학승(學僧)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승려들의 실제 모습은 거의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승려는 역승(役僧)이며, 그들의 존재가 잊혀진다면 불교사가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역승의 모습을 되집어 보려는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를 반추하고 추억하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선시대 일기에는 의외로 많은 승려들이 등장한다. 이들 중에는 불법(佛法)을 논하고 시문을 즐기는 학승(學僧)도 있지만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승려는 국역(國役)에 동원되던 역승(役僧)으로 일상의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승려는 국역담당자로서 불법을 넘어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본고는 이문건(李文楗:1495∼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1535∼1567)』를 자료로 하여 안봉사(安峰寺)의 물품생산에 승려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동원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승역이라 하면 종이생산만이 알려졌지만, 여기서는 종이생산 이외에 사찰 내에서의 승역의 전반적인 측면을 밝혀내려는 것이다. 안봉사는 사유지(寺有地) 30마지기와 사위전(寺位田) 1결의 경제규모를 갖고 작은 사찰로 평상시에는 10∼20명 정도의 승려만이 상주했으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40명이 넘는 승려가 적을 두고 있는 대규모 사찰이었다. 승려가 공적으로 동원되는 부역은 지방관에서 필요한 공물과 잡물을 생산하는 과정이었으며, 이들이 생산한 종이·삼베·메주·도토리 등은 지방관아의 운영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승려가 제작한 메주와 가을에 수습한 도토리 씻는 작업은 일반 백성에 대한 구휼제도(救恤制度)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문건은 안봉사를 통해 개인적인 물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종이제작, 삼베 숙련, 두부 만들기, 기름짜기 등이었다. 이러한 물품은 양반 개인의 생활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 승려의 기술력이 조선시대 승려가 살아남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었다.
기대효과
1)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 가능 그동안 사찰은 독립적인 수공업 단위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찰이 지방군현의 공물납부체제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안봉사는 지방 관아에서 지급한 닥나무·마(麻)·콩·도토리 등 ...
1)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 가능 그동안 사찰은 독립적인 수공업 단위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찰이 지방군현의 공물납부체제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안봉사는 지방 관아에서 지급한 닥나무·마(麻)·콩·도토리 등을 가공해서 바치는 역할을 담당했다. 종이생산에 있어서 유나승(維那僧)이 생산의 모든 과정을 관리 감독했다는 사실이 주목되고 있다. 유나는 역승을 운영하기 위한 방식의 일환이었다. 아울러 메주생산이나 도토리 씻기는 지방군현의 구휼작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도 새롭게 밝힌 부분이다. 2) 역승(役僧)의 활동을 통한 사찰 생활사의 새로운 모색 본고에서는 사찰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다채롭게 파악했다. 지금까지는 사찰생산품으로 종이만이 주목되었으나 이 외에 지방관아와 관련된 숙마(熟麻) 과정·메주생산·도토리 씻기를 새롭게 밝혔으며, 양반가의 종이제작·삼베삼기·두부만들기·기름짜기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함으로서 역승들의 사찰생활사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3) 재미있는 글쓰기와 콘텐츠로서의 활용 가능성 제시 일기를 역사연구에 적극 활용함으로서 살아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경상도 성주지역의 안봉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틀과 규정을 파악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글쓰기 과정에서 이문건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인간적인 모습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함으로서 전근대와 현대가 소통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제시하고자 했다.
연구요약
안봉사는 성주 이씨 14위의 초상화를 봉안한 성주 이씨의 원찰이다. 이러한 관계로 이문건은 안봉사는 물론이고 여기에 소속된 승려, 안봉사에 설정된 안산호(安山戶)의 일까지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안봉사 승려들은 사찰과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일, 친인 ...
안봉사는 성주 이씨 14위의 초상화를 봉안한 성주 이씨의 원찰이다. 이러한 관계로 이문건은 안봉사는 물론이고 여기에 소속된 승려, 안봉사에 설정된 안산호(安山戶)의 일까지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안봉사 승려들은 사찰과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일, 친인척의 일에 이르기까지 이문건에게 찾아와 부탁하곤 했다. 안봉사의 종이제작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물로 수취한 닥나무를 사찰에 분급하여 종이를 제작하게 했다. 특히 주에서는 안봉사 이외에 산사 승려들이 사찰 경내와 지소에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사찰의 종이제작 과정은 유나승(維那僧)이 주관했는데, 이들은 닥나무를 사찰에 분급하고 종이를 관아에 납부하는 과정을 총괄했다. 안봉사는 삼베를 베어 껍질을 익힌 숙마(熟麻)를 성주목에 상납했다. 숙마란 희고 부드럽게 제작된 베로 옷감을 제작하기 이전 상태를 말한다. 삼베의 제작과정에는 종이제작 못지않은 고된 노역이 들어갔다. 먼저 삼나무의 잎을 훑어낸 다음 삼나무를 잿물을 넣고 오랫동안 찐다. 삼이 푹 익으면 삼의 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 숙마과정이 잘 되면 베가 희고 부드러워 품질이 뛰어난 베를 얻을 수 있다. 안봉사에서는 또한 메주[末醬]를 만들어 성주목에 납부하기도 했다. 성주에서는 콩[太]을 사찰에 분급하여 메주를 담그도록 했다. 메주는 장을 담그는 주재료였다. 장은 지방군현의 각종 영건(營建) 사업과 백성에 대한 진휼(賑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봉사의 승려들은 도토리 손질도 담당했다. 이 도토리는 성주지역 공물로 도토리와 각 사찰에서 수습한 도토리를 사찰에 나눠주어 손질하게 했던 것이다. 이문건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품의 일부를 승려들을 동원하여 마련했다. 구체적으로는 종이제작·삼베삼기·두부만들기·기름짜기 등이었다. 이문건은 자신의 생활에 원찰인 안봉사 승려들이 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비록 역승이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은 양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 되고 있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李文楗(1495∼1567)의 『默齋日記』(1535∼1567)를 통해 16세기 경상도 星州牧 僧侶의 물품생산과정과 승려의 賦役의 실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다양한 문제들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 ...
李文楗(1495∼1567)의 『默齋日記』(1535∼1567)를 통해 16세기 경상도 星州牧 僧侶의 물품생산과정과 승려의 賦役의 실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다양한 문제들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동안 사찰은 독립적인 수공업 집단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찰은 지방군현의 공물납부체제와 일정한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경상도 성주 소재 안봉사는 지방 관아에서 지급하는 닥나무·麻·콩·도토리 등을 가공해서 바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종이생산에 있어서 維那僧이 생산의 모든 과정을 관리 감독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아울러 메주생산이나 도토리 씻기는 지방군현의 구휼작업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경상도 星州牧의 종이제작은 寺刹과 紙所로 이원화되었다. 먼조 사찰의 종이제작 과정은 維那승이 주관하대 되어 있었다. 유나승은 종이를사찰에 분급하고 거둬들이는 일을 총괄했다. 유나라는 직책은 사찰별로돌아가면서 맡게 되었는데, 동일한 승려가 일을 주관한다는 점에서 일의 효율을 꾀할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들에게 휘둘리기도 했다. 또한 성주 관아 인근에 소재한 紙所에서도 승려를 장인으로 동원하여 종이를 제작했다. 안봉사의 승려 중의 일정수가 紙所에 차정되어 종이를제작하고 있었다. 종이제작이 이원화된 까닭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지소의 성격도 규정하기 어렵지만 지소의 존재가 여전히 고려적인 遺制인 것이다. 役僧의 활동을 통해 사찰 생활사의 새로운 모색이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사찰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그리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알려졌던 사찰의 종이생산 이외에 熟麻과정·메주생산·도토리 씻기를 새롭게 밝혀냈으며, 양반가의 종이제작, 삼베삼기·두부만들기·기름짜기의 구체적 실상을 밝힘으로서 역승들의 사찰생활사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16세기 경상도 성주목의 안봉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구조와 규정을 파악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문건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인간적인 모습도 자연스럽게 드러남으로서 전근대와 현대의 소통의 가능성도 열렸다. 조선시대 불교라고 하면 崇儒抑佛을 연상한다. 사실 僧科와 度牒制를 폐지하여 승려의 관직진출은 물론이고 승려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었다. 전란 중에 활동했던 몇몇 뛰어난 승장과 뛰어난 學僧만을 기억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승려들의 삶이 잊혀져서는 안된다. 어느 정도의 승려가 있었으며, 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보다 다양하질 필요가 있다. 사실은 화려했던 과거를 반추하고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의 승려는 최고의 기술자이면서 전문가 집단이었다. 그들이 최고의 수공업집단이라는 특성이 조선 사회에서 승려의 위상을 높여주는 기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영문
The study examined the true picture of tributes and labor burden of monks in Seongju, Kyongsang-do in the 16th century based on the Mukjaeilgy (1535-1567) of Lee Mun-geon (1495-1567). It was summarized to replace its conclusion. The paper notes that t ...
The study examined the true picture of tributes and labor burden of monks in Seongju, Kyongsang-do in the 16th century based on the Mukjaeilgy (1535-1567) of Lee Mun-geon (1495-1567). It was summarized to replace its conclusion. The paper notes that the production of paper in the Anbongsa Temple is in line with the tribute system operated by the local county. The Anbongsa Temple was a small temple having 30 majigi of temple site, and 1 gyeol of temple field in Seongjumok. There were approximately 10-20 monks ordinarily, and ometimes it reached nearly 40 people. It seems that some of these monks entered priesthood with a hopae, an identity tag, but many had no priesthood tag. As the Anbongsa Temple owned the land, it was registered on the 8 gyeol-household of the local county, and became a unit of tribute payment, labor imposition and patient classification under the name of Ansanho. Paper mulberry, a tribute in Seongju area, was distributed to temples in Seongju area including the Anbongsa Temple and paper was made of it. A paper maker was located around the Seongju government office, and monks were brought to involve in the production of paper. The fact that the paper was made of collected paper mulberry and a paper maker existing at the local government office was the relics of Goryeo Dynasty. From the fact that not every monk in Anbongsa Temple was a priesthood holder with a hopae at that time, and the temple site owned by the Anbongsa Temple existed, it can be said that the local county registered the Ungok area where the land of the Anbongsa Temple was located as Ansanho to impose tributes like a general household. In this sense, the area had been interlocked with a taxation system of the local county, and temples were registered as a household like a general household to pay tributes and miscellany.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지금까지 조선시대 불교사연구는 불교탄압이라는 피해의식이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란 중에 활약한 승장(僧將)과 불법(佛法)과 학문을 계승한 학승(學僧)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승려들의 실제 모습은 거의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 ...
지금까지 조선시대 불교사연구는 불교탄압이라는 피해의식이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란 중에 활약한 승장(僧將)과 불법(佛法)과 학문을 계승한 학승(學僧)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승려들의 실제 모습은 거의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승려는 역승(役僧)이며, 그들의 존재가 잊혀진다면 불교사가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역승의 모습을 되집어 보려는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를 반추하고 추억하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선시대 일기에는 의외로 많은 승려들이 등장한다. 이들 중에는 불법(佛法)을 논하고 시문을 즐기는 학승(學僧)도 있지만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승려는 국역(國役)에 동원되던 역승(役僧)으로 일상의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승려는 국역담당자로서 불법을 넘어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본고는 이문건(李文楗:1495∼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1535∼1567)』를 자료로 하여 안봉사(安峰寺)의 물품생산에 승려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동원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승역이라 하면 종이생산만이 알려졌지만, 여기서는 종이생산 이외에 사찰 내에서의 승역의 전반적인 측면을 밝혀내려는 것이다. 안봉사는 사유지(寺有地) 30마지기와 사위전(寺位田) 1결의 경제규모를 갖고 작은 사찰로 평상시에는 10∼20명 정도의 승려만이 상주했으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40명이 넘는 승려가 적을 두고 있는 대규모 사찰이었다. 승려가 공적으로 동원되는 부역은 지방관에서 필요한 공물과 잡물을 생산하는 과정이었으며, 이들이 생산한 종이·삼베·메주·도토리 등은 지방관아의 운영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승려가 제작한 메주와 가을에 수습한 도토리 씻는 작업은 일반 백성에 대한 구휼제도(救恤制度)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문건은 안봉사를 통해 개인적인 물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종이제작, 삼베 숙련, 두부 만들기, 기름짜기 등이었다. 이러한 물품은 양반 개인의 생활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 승려의 기술력이 조선시대 승려가 살아남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1)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 가능 그동안 사찰은 독립적인 수공업 단위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찰이 지방군현의 공물납부체제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안봉사는 지방 관아에서 지급한 닥나무·마(麻)·콩·도토리 등 ...
1) 16세기 사찰 입역체제의 구조적인 이해 가능 그동안 사찰은 독립적인 수공업 단위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찰이 지방군현의 공물납부체제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안봉사는 지방 관아에서 지급한 닥나무·마(麻)·콩·도토리 등을 가공해서 바치는 역할을 담당했다. 종이생산에 있어서 유나승(維那僧)이 생산의 모든 과정을 관리 감독했다는 사실이 주목되고 있다. 유나는 역승을 운영하기 위한 방식의 일환이었다. 아울러 메주생산이나 도토리 씻기는 지방군현의 구휼작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도 새롭게 밝힌 부분이다. 2) 역승(役僧)의 활동을 통한 사찰 생활사의 새로운 모색 본고에서는 사찰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다채롭게 파악했다. 지금까지는 사찰생산품으로 종이만이 주목되었으나 이 외에 지방관아와 관련된 숙마(熟麻) 과정·메주생산·도토리 씻기를 새롭게 밝혔으며, 양반가의 종이제작·삼베삼기·두부만들기·기름짜기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함으로서 역승들의 사찰생활사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3) 재미있는 글쓰기와 콘텐츠로서의 활용 가능성 제시 일기를 역사연구에 적극 활용함으로서 살아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경상도 성주지역의 안봉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틀과 규정을 파악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글쓰기 과정에서 이문건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인간적인 모습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함으로서 전근대와 현대가 소통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제시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