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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포왜관 시기와 초량왜관 시기 연례송사 접대 비교 연구 - 『접왜식례』(1659)와 『영남접왜식례개등록』(1732)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mparison of The Reception for Japanese Envoys(an annual envoys) in Dumopo-Waegwan Period and Choryang-Waegwan Period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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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A8-2018S1A5A8030068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5월 01일 ~ 2019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심민정
연구수행기관 동명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 시대의 외교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使臣”은 그 나라의 외교정책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 후기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로는 國王使에 해당하는 回答兼刷還使, 通信使, 그 외 대마도와의 관계 및 외교 현안, 교역 등을 목적으로 파견한 譯官使인 問慰行이 대표적이다.
    한편 일본측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사신은 대마도 혹은 막부와 관련한 외교 문제를 주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差倭, 주로 무역에 비중이 높았던 特送船ㆍ歲遣船 등의 年例送使, 그리고 受職人 등이 존재했다. 양국의 사신은 모두 외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왕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통신사에 대한 연구만 집중되어 있을 뿐 그 외의 사신, 특히 일본 사신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성과가 많지 않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 사신 중 특히 외교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미흡했던 “연례송사”에 주목한다.
    사신과 관련한 연구에서도 사신 접대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다. 사신에 대해 연향 등의 접대를 베푼다는 것은 이들을 외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접대례를 통해 자국의 외교적 위상을 재인식시키는 측면이 있다. 즉 이 또한 대외정책 실현의 연장인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달라진 조선후기의 교린정책, 특히 일본으로 교린 대상이 축소된 상황에서 그 변화를 가장 잘 반영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사신접대”를 교린정책과 접목시켜 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사신 접대와 관련한 연구는 주로 초량왜관 시기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그 이전 시기인 두모포왜관 시기에도 초량왜관 시기와 접대가 동일하였을 것으로 파악한 연구도 있었다.
    본 연구 과정에서는 조선 후기의 외교정책이 항상 동일할 수 없었듯이 倭使에 대한 접대도 두모포왜관 시기와 초량왜관 시기가 동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목적이 있다. 동시에 이 사실을 통해 조선 후기 대일 교린정책의 의미를 명확히 확인하고 再考할 필요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 倭使 접대 연구의 공백시기를 보충한다. 倭使 接待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초량왜관 시기로 편중된 경향이 있다.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왜사 접대 연구의 공백시기인 두모포왜관 시기의 연구를 보충하여 두 시기의 접대 실태를 비교‧정리하는 목적을 가진다.
    둘째, 새로운 사료의 소개와 활용을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이전까지 활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를 통해 부족한 연구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로 『接倭式例』와 『嶺南接倭式例改謄錄』이 있다. 『접왜식례』는 연례송사 접대의례와 접대물품 등은 1659년 일례를 기록하였다. 『영남접왜식례개등록』은 1732년(英祖8) 9월 내도한 일본 사신에게 조선에서 日供과 宴享잡물, 公貿易에 대한 내역을 경상도감영에서 기록한 등록이다. 이들 자료는 기존에 활용이 미진했으므로 본 연구를 통해 자료의 활용을 높이고, 규정이나 제도보다 실제 사례 파악에 본 자료들을 충실하게 분석할 필요를 느낀다.
    셋째, 차왜의 접대 기준이 되었던 연례송사 접대례의 구체적 양상을 구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연례송사는 “차왜” 보다 외교적 성격은 덜 부각되었지만, “사신접대”의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두모포왜관 시기에는 기존에 접대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차왜가 조선의 접대를 받는 대상이 되면서 연례송사의 접대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준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존에 “무역의 대상”으로 치부된 경향이 큰 연례송사에 새로이 ‘외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있다.
  • 기대효과
  • 이상과 같이 연구가 진행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다.
    ① 조일 간 사신 관련 연구의 다양성 및 확장성에 기여
    기존의 사신 관련 연구 중 많은 성과를 거두었던 통신사 연구를 예로 들면, 기본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후 문학, 음식, 의복, 문화, 콘텐츠 연구까지 다양한 분야로의 연구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일본사신은 조선으로 그 정도의 문화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사신을 통한 각 분야의 교류 실태, 접대를 이용한 타 분야의 연구 및 사업으로 확장성이 기대된다.
    ② 편중된 연구시기에 대한 보완 및 기초자료 발굴로 학문 발전에 기여
    본 연구가 성과를 낳는다면, 부족했던 두모포왜관 시기 대한 기본 자료가 제공되어 다양한 차후 연구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조선시대 한일관계 연구에 새로운 기초자료를 형성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타 분야 연구로의 확장성 및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연구에 이용하게 될 자료들은 기존 연구에서 제대로 인용하지 못한 사료인 관계로 미사용되던 기초사료의 재발굴 및 이용에도 기여하는 바가 있다.
    ③ 문화콘텐츠 및 관련 행사에 활용 가능
    “사신”이라는 주제는 외교적 성격이 강해 다소 경직된 연구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접대”라는 측면과 “의례”라는 측면을 잘 활용하면 문화적인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통신사” 관련 행사를 들 수 있다.
    통신사는 외교사행으로서는 딱딱한 주제일 수 있으나 사신행렬, 의례, 연향, 공연 등의 요소가 고증되면서 문화적인 행사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일본 사신 접대 또한 통신사와의 연결 고리로서도 물론이고 왜관을 접촉점으로 한 연향, 공연, 음식 문화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로 연결되면 문화콘텐츠나 문화행사 등 민간 교류의 일면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④ 지역사 연구 및 활용에 기여
    본 연구의 핵심 지역은 부산이다. 부산은 조선 후기 일본 사신을 전담했던 왜관이 있었던 지역이다. 최근 부산 지역은 초ㆍ중등 사회 및 역사 관련 교과서 배부와 함께 지역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부산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참고 보조교재를 함께 첨부하여 배포하였다고 한다. 이런 취지에 맞게 본 연구도 지역사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공하여 이른 시기부터 학생들에게 지역사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켜 다양한 분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두모포왜관 시기의 일본사신 접대 사례 및 양상을 확인하고, 초량왜관 시기와 비교해 본다. 이 작업에는 그동안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接倭式例』와 『嶺南接倭式例改謄錄』을 충실히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작업이 선행되면 초량왜관시기와 동일했을 것이라 여겨졌던 두모포왜관 시기 일본사신 접대 사례의 차이점과 특징이 구체적으로 도출될 것이다.
    특히 본 연구 내용에서 다루고자 하는 사신은 “연례송사”이다. 연례송사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신접대”라는 측면에서 접대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차왜가 정례화된 접대를 받기 시작하는 시기가 1635년 12월부터라는 기존 연구 결과를 보았을 때, 연례송사는 이미 그 전부터 접대례를 실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접왜식례』에 의하면, 차왜에게 접대례 적용시 ‘특송사선례, 세견1선례, 세견4선례’ 등 연례송사선 접대례를 그 기준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차왜 접대 보다 앞서 연례송사에 대한 접대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본 과정에서 진행하게 될 연구 내용은 “두모포왜관 시기 및 초량왜관 시기의 일본사신 접대 양상을 정리”하는 것이다. 접대 규정 변화에 대해서는 약조의 체결이나 특징적인 변동이 있는 시기를 기준으로 조선 후기 전체를 구분해 보았다. 그리고 접대 실태 부분은 『접왜식례』가 담고 있는 1659년과 『嶺南接倭式例改謄錄』의 일례가 담긴 1732년 두 시기의 사례를 중심으로 비교ㆍ정리하고자 한다.
    연구 내용이 다루게 될 대상은 “연례송사 접대”로 한정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 후기 전체 시기의 일본사신 접대 사례의 특징을 도출하여 외교적 함의를 정리하려 한다. 항목별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두모포왜관 시기 연례9송사와 초량왜관 시기 연례8송사의 접대 규정이 ‘己酉約條-兼帶-왜관이전기’의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확인한다.
    둘째, 연례송사 접대대상 인원, 연향 횟수, 留館 일수 등의 기본 규정 및 접대에 소용된 물품, 회사품, 식재료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한다.
    셋째, 연례송사 접빈례의 구체적 내용을 정리한다. 구체적인 의례의 형태나 운영에 대해서는 크게 ‘접대식, 서계식, 왜사접숙배식’으로 구분하여 확인한다. 이 부분이 확인되면 차후 차왜 접대 과정에서 연례송사 접빈례가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또한 확인 가능할 것이다.
    넷째, 외교사신으로서 연례송사의 의미를 파악한다. 두모포왜관 시기는 교린 사신 접대의 외교적 측면에서 볼 때 과도기적 성격이 강한 시기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특수성을 지니는지 본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편 연례송사 접대 양상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관수차왜”가 지니는 특수성이다. 초량왜관 시기 관수차왜는 “차왜”의 범주에 들어가 있지만 접빈례는 연례송사와 동일하다. 또한 두 사례집에서도 관수차왜는 연례송사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이렇게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관수차왜의 의미를 접대례 분석을 통해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 진행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 방법을 적용한다.
    첫째, 본 연구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문헌자료들을 해독하고 분석하는 “문헌학적 연구방법”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문헌자료 해독 및 분석이 어려운 경우는 자문을 구한다.
    둘째, 자료를 도식화하여 정리, 분석한다. 두모포왜관 시기와 초량왜관 시기 왜사 접대례가 변화하는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기별 접대 사례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연례송사의 경우 크게 己酉約條 체결시기, 겸대 실시 이후로 접대 규정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구체적인 변동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즉 결과 도출을 위해서는 접대사례를 시간순으로, 각 시기별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ㆍ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를 한 눈에 파악하기 쉽게 자료를 도식화 하겠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일본 사절이었던 연례송사(年例送使)의 개념과 범주를 비롯하여 이 사신들이 어떻게 접대를 받았는지, 접대 규정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연례송사의 활동, 그 중에서도 특히 무역 활동에 연구가 집중된 경향이었다. 그런데 연례송사의 개념과 범주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기존 연구가 진행되다 보니 송사의 외교적 성격보다 무역과 관련한 성격이 더 부각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연례송사는 1년에 한 번씩 조선으로 내도한다는 특성 외에 조선 측 빈례 규정에 따라 접대를 받는 사절이었다. 이를 간과한 나머지 연례송사의 개념을 서술한 사전에는 접대 대상에서 제외되어간 수직왜(受職倭)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한 초량왜관 시기 『통문관지』 『증정교린지』 등의 규정집에 제시되어 있는 8송사만을 범주에 포함시켜 겸대제(兼帶制) 시행 이후 ‘연례송사=연례8송사’라는 동일 개념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연례송사의 범주는 두모포왜관, 초량왜관 전체 시기를 통틀어 계속 변화했으며, 18세기 초반에 가서야 8송사로 정착되었다. 연례송사의 범주가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점은 겸대제의 시행이다. 이로 인해 접대하는 송사는 기존 25명 전후의 인원에서 9~10송사로 감소하게 되었다. 이후 초량왜관 시기에는 아명송사가 접대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연례8송사로 장착되어 갔다.
    연례송사에 대한 접대 관련 규정들도 겸대제 시행이 기준이 되었다. 서계식의 용어 변화나 숙배례 시 당상에서 시행할 것을 요청하는 것 등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과 대마도 측에 중대한 관계 혹은 상황 변화가 야기될 경우에도 사신접대 의례가 변화하거나 변화 요청이 진행되었다. 당상숙배의 경우 겸대제 시행, 병자호란 발생 시 일본 측 요청이 있었으며, 초량으로 왜관 이전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그 이듬해에 다시 당상숙배 요청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조선 측은 기존의 교린 대상에 대한 규정을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 때문에 끝내 새로운 규정 변화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
    연향의례의 경우는 기유약조 체결이 기점이 되었다. 기유약조로 인해 접대해야 할 연례송사 범주에 변동이 생기면서 새로운 접대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주객(主客)이 북남으로 자리했던 위차가 동서로 변경되고, 양측이 재배(再拜)와 답배(答拜)로 행하던 상견행례가 상읍례(相揖禮)로 변경되었다. 또 일본 측 정관의 지위 고하에 따라 달리 적용되었던 접대례도 점차 단일화 되어갔다. 다만 단일화 시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외교 관계 변화가 있었던 겸대제 시행이 기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영문
  • This study has taken a look at the concept and category of Yeonryesaongsa (Japanese envoys in a year) the representative Japanese envoy in the later Joseon and how these envoys were accommodated and what changes were available in the reception rule.
    In the previous studies of the activities of Yeonryesaongsa, these studies had tendency of concentrating on the trade activities in particular. But, Yeonryesaongsa had the envoy to receive in accordance with the national ritual of envoy rule of Joseon in addition to its characteristics of inner ways to Joseon once a year. Category of Yeonryesaongsa has made changes throughout the entire period of Dumopo-Waegwan and Choryang-Waegwan and was settled for 8-Songsa only in the first part of the 18th century.
    The most important turning point to change the category of Yeonryesaongsa was the implementation of the Gyeomdaeje. Because of this, the reception Songsa was reduced from around 25 persons to 9~10 Songsas. Thereafter, during the Choryang-Waegwan period, the Amyeong Songsa was excluded from the reception subject to settle for Yeonrye-8-saongsa.
    Regulations related to reception on Yeonryesaongsa were based on the Gyeomdaeje implementation. Examples are found in the change of terms for the Seogyesik or request to implement by Dangsang(the floor of Royal Palace) in the Sukbaerye. In addition, in the event that there is a material relationship or situational change to Joseon and Daemado(Tsusima), the ceremony of envoy reception was changed or a request for change was proceed. For the case of Dangsangsukbae, Gyeomdaeje implementation, and Chinese Invasion in the Year of Byeongja, there was a request by Japanese part, and when the transfer of Waegwan was determined to Choryang, the request of Dangsangsukbae was raised again in the following year. For the case of the banquet ritual, the execution of the Giyu-treaty was the turning point. Due to Giyu-treaty, there was a change in the category of Yeonryesaongsa to make the reception, and there was a need for new reception rule. Because of this, the position that the main guest was taken for north to south that was resulted in change to east to west, and the Sanggyeonhaengrye that was exercised by both parties in first bow and replay bow is changed to Sangeuprye. Also, the reception rite that was differently applied depending on the level of positions for the Japanese officers became more unified gradually. However, with respect to the unity and point of time, this article has not confirmed, but it is assumed to have the bases in implementing Gyeomdaeje when there was a change of diplomatic relationship.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일본 사절이었던 연례송사(年例送使)의 개념과 범주를 비롯하여 이 사신들이 어떻게 접대를 받았는지, 접대 규정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연례송사의 활동, 그 중에서도 특히 무역 활동에 연구가 집중된 경향이었다. 그런데 연례송사의 개념과 범주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기존 연구가 진행되다 보니 송사의 외교적 성격보다 무역과 관련한 성격이 더 부각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연례송사는 1년에 한 번씩 조선으로 내도한다는 특성 외에 조선 측 빈례 규정에 따라 접대를 받는 사절이었다. 이를 간과한 나머지 연례송사의 개념을 서술한 사전에는 접대 대상에서 제외되어간 수직왜(受職倭)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한 초량왜관 시기 『통문관지』 『증정교린지』 등의 규정집에 제시되어 있는 8송사만을 범주에 포함시켜 겸대제(兼帶制) 시행 이후 ‘연례송사=연례8송사’라는 동일 개념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연례송사의 범주는 두모포왜관, 초량왜관 전체 시기를 통틀어 계속 변화했으며, 18세기 초반에 가서야 8송사로 정착되었다. 연례송사의 범주가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점은 겸대제의 시행이다. 이로 인해 접대하는 송사는 기존 25명 전후의 인원에서 9~10송사로 감소하게 되었다. 이후 초량왜관 시기에는 아명송사가 접대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연례8송사로 장착되어 갔다.
    연례송사에 대한 접대 관련 규정들도 겸대제 시행이 기준이 되었다. 서계식의 용어 변화나 숙배례 시 당상에서 시행할 것을 요청하는 것 등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과 대마도 측에 중대한 관계 혹은 상황 변화가 야기될 경우에도 사신접대 의례가 변화하거나 변화 요청이 진행되었다. 당상숙배의 경우 겸대제 시행, 병자호란 발생 시 일본 측 요청이 있었으며, 초량으로 왜관 이전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그 이듬해에 다시 당상숙배 요청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조선 측은 기존의 교린 대상에 대한 규정을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 때문에 끝내 새로운 규정 변화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
    연향의례의 경우는 기유약조 체결이 기점이 되었다. 기유약조로 인해 접대해야 할 연례송사 범주에 변동이 생기면서 새로운 접대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주객(主客)이 북남으로 자리했던 위차가 동서로 변경되고, 양측이 재배(再拜)와 답배(答拜)로 행하던 상견행례가 상읍례(相揖禮)로 변경되었다. 또 일본 측 정관의 지위 고하에 따라 달리 적용되었던 접대례도 점차 단일화 되어갔다. 다만 단일화 시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외교 관계 변화가 있었던 겸대제 시행이 기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① 기존에 연구가 부진했던 일본사신 관련 연구 확대에 기여

    기존의 사신 관련 연구 중 많은 성과를 거두었던 통신사 연구의 경우, 기본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후 문학, 음식, 의복, 문화, 콘텐츠 연구까지 다양한 분야로의 연구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일본사신은 제한적인 파견 장소 탓에 조선으로 그 정도의 문화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부분은 있으나, 일본사신을 통한 각 분야의 교류 실태, 접대를 이용한 타 분야의 연구 및 사업으로 확장성이 기대된다.
    일본 사신에 대한 연구 중 차왜 관련 연구는 일정 부분 진행되었으나, 연례송사의 경우는 사신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 연례송사를 통한 무역 관련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에 본 연구를 기점으로 ‘사신으로서의 연례송사’ 연구가 확대되는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② 강연, 강의 등에 연구 결과 활용, 지역사회에 알림

    본 연구는 지역사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공한다. 본 자료를 활용하여 수업을 듣는 학생들 및 지역사에 관심있는 지역민들에게 강의 및 강연 자료로 이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지역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③ 기존의 ‘송사’, ‘연례송사’, ‘연례8송사’ 등 용어의 개념 정의 오류 수정


    조선 시대 일본 사신 관련 용어를 정리한 기존 사전류에서는 ‘연례8송사’에 대한 개념 정의만 이루어졌다. 심지어 ‘연례8송사’는 ‘연례송사’와 동일한 개념의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송사’, ‘연례송사’의 개념을 사례를 들어 정의하였다.
    이 연구 결과를 통해 ‘연례송사’의 개념 오류가 수정되고, 범주가 새로이 정리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④ 부산 지역의 문화콘텐츠 및 관련 행사에 활용 가능

    “사신”이라는 주제는 외교적 성격이 강해 다소 경직된 연구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접대”라는 측면과 “의례”라는 측면을 잘 활용하면 문화적인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통신사” 관련 행사를 들 수 있다.
    통신사는 외교사행으로서는 딱딱한 주제일 수 있으나 사신행렬, 의례, 연향, 공연 등의 요소가 고증되면서 부산 문화 축제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일본 사신 접대 또한 통신사와의 연결 고리로서도 물론이고 왜관을 접촉점으로 한 연향, 공연, 음식 문화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로 연결되면 문화콘텐츠나 문화행사 등 민간 교류의 일면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연례송사, 일본사신 접대, 일본사신, 연례8송사, 『접왜식례』, 『접왜식례개(이정)등록』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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