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는『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자본주의를 접촉하는 것마다 흡수하고 소화해버리는 무시무시하고도 유연한 괴물에 비유한다. 자본주의의 무한한 유연성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상아탑이기는커녕 사회 현실을 재생산하는 기관실이 되었 ...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는『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자본주의를 접촉하는 것마다 흡수하고 소화해버리는 무시무시하고도 유연한 괴물에 비유한다. 자본주의의 무한한 유연성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상아탑이기는커녕 사회 현실을 재생산하는 기관실이 되었고,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에 포섭되거나 게토화됨으로써 외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셔가 말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자본주의 체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일컫는데, 이는 우리가 자본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속박의 상태에 놓여있음을 가리키는 용어라고도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일상생활의 종교를 주관하는 세속의 신이 되었다는 마르크스의 언명이나, ‘총체성, 사회, 그리고 신성(divinity)은 사실상 동일한 관념의 서로 다른 측면들일 뿐’이라는 뒤르켐의 언명은 이제 자명한 사실로 증명된 듯 보인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 등 온갖 ‘~사회’에 대한 담론이 성행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형식/구조에 대한 분석/논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비가시화된 구조,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화하는 양상만을 파편적인 현상으로 제시할 뿐, 근본적인 작동 원리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아도르노는, 여타 사상가들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을 현상하는 방식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파고든 현대 사상가이다. 아도르노 역시 마르크스나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총체성’, 즉 ‘총체적으로 매개된 전체’로 파악했다. 철학자나 미학자로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도르노는 사회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생산하고, 독일 사회학계에서 실증주의 논쟁을 주도하고 이끈 비판적 사회이론가이다. 물론 이때 그가 연구한 사회학(더 정확히는 사회학 비판)은 사회학이라는 분과 학문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분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변증법적 사회이론의 성격을 띤다. 특히 그의 논문「사회」는 전자본주의 사회와 뚜렷한 단절을 이루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담은 글로서, 그는 이 글을 통해 철저한 헤겔의 후예이자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아도르노는 여기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로 ‘교환관계’를 제시하는데, 아도르노의 사유에 있어 교환 개념이 갖는 중요성은 익히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교환 개념이 60년대 초에 아도르노에 의해 주도된 새로운 마르크스 독해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그다지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워너 본펠드의 지적처럼,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경제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통설로 굳어진 탓이 가장 클 것이다. 또한, 아도르노에 대한 연구가 주로 철학과 문학(미학)과 같은 분과 학문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는 반면, 그의 사회이론은 분과를 가로지르는 이론적 탐구를 요청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교환원리가 아도르노의 철학, 미학, 사회학, 문학, 교육학 등 모든 영역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아도르노의 교환 개념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보다 정교한 고찰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회에서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특수한 형식으로서의 ‘추상노동’에 대한 이해, 그리고 지배 관계를 성립시키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가치’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아도르노의 사상의 정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사회 개념과 더불어 그것의 핵심적인 원리를 구성하는 교환, 추상노동, 가치 개념에 대한 연구는 아도르노 연구자뿐만 아니라 문화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모든 후속 연구에 앞서, 반드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