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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통치기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이진호(李軫鎬)의 조선교육론과 교육정책(1924~1929)
Lee Jin-ho, Director-General of the Korean Government-General's Office of Education (1924-1929) on the theory of Joseon education and education polic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B유형)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1S1A5B5A17058746
선정년도 2021 년
연구기간 1 년 (2021년 09월 01일 ~ 202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임이랑
연구수행기관 (사)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첫째, 일제시기 동화주의 교육정책・식민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한 단초로써,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냈던 이진호의 조선교육론과 교육정책을 규명하고자 한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이 식민지 조선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이 주제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가 주로 교육학계에서 이루어지면서 정책의 변천을 정리하거나 교육담론 혹은 제도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경향이 있고, 역사학계의 논의 또한 ‘민족말살교육’이라는 논의에 초점이 맞추어진 감이 있다. 본 연구는 기왕의 선구적 연구를 적극 참조하되, 미흡했던 부분에 포착하여 일제시기 교육정책의 실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시도하고 싶다.
    이진호(1867~1943)는 대한제국기 중추원 부찬의, 평남 관찰사, 일제시기 전북 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등을 지낸 인물이다. 학무국은 일제하 조선총독부 체제에서 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으로 대별되는 문교행정을 담당하는 교육행정기구로서, 일제시기 이른바 ‘식민지 동화교육’을 추진한 부서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기 조선인이 조선총독부 관료로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대표적 고위직은 도지사였는데, 총독부 인사의 관례로 총독부 국장급은 도지사보다 관등이 높아야 가능했다. 대부분의 조선인 관료들이 도지사에서 관력을 마감한 것에 비해 중앙의 국장급까지 올랐던 이진호는 매우 이례적 사례였다. 따라서 이진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이진호를 최초의 조선인 국장으로 배출한 학무국은 어떠한 부서인지에 대해 살피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하겠다. 요컨대 제도적, 학교사적 정리가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 실무를 담당했던 관료들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교육정책의 실상을 실질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시도해 보고자 하며, 이진호는 이에 매우 유효한 대상이다.
    둘째, 1920년대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역할과 위상을 조선인 국장을 통해 조망함으로써, 이른바 ‘문화통치’특징의 일단을 살핀다.
    일제시기 전 기간을 통털어 조선총독부의 국장급까지 오른 조선인은 2명뿐이었는데, 그 2명이 모두 학무국에서 임명되었다. 그 중 이진호는 조선총독부 최초의 조선인 국장으로서 당시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는데, 대체로 1919년 3.1운동 이후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겉치례식 선전용 인사였다고 하기에는 재임기간이 4년 1개월로(1924년 12월~1929년 1월)로 일본인 포함 총 14명의 학무국장 중 2번째로 길다. 뿐만아니라 그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사이토 총독이 사임한 후 신임 야마나시 총독이 부임한 후에도 유임했으며, 그의 재임기에 초등교육확장정책(1면1교제), 경성제국대학 창설 등 간판 교육정책들이 전개되었고 1928년에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저항 운동이라 일컫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여 그 대응마련을 학무국이 담당하기도 했다. 즉 이진호 재임기는 1920년대 ‘문화통치’의 시대와 맞물린 것이다. 이에 이진호를 통해 학무국의 역할과 작동 방식을 규명함으로써 1920년대 문화통치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제시기 조선인 관료의 의미를 역사적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지금까지 조선인 관료는 대체로 ‘친일파’로서 초점을 맞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친일 행적에 대한 규명은 물론 매우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친일관료는 규탄의 대상이지 본격적 연구대상이 되지 못한 경향 또한 있었다고 본다. 최근 관료로서 접근하는 연구들이 소수 발표되었으나 선행연구는 여전히 친일행적이나 인사문제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본 연구는 이진호라는 조선인 관료 개인이 시행한 구체적 정책을 분석하여 식민통치에서의 역할을 규명함으로써, 친일파 연구를 보완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첫째,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식민관료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는 미약했던 학무관료 분야를 규명함으로써, 교육정책, 교육제도사 중심의 연구들이 주를 이루었던 속에서 기왕의 연구들과 상호작용하여 보다 풍부한 논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해방 이후 식민교육의 잔재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인적 조건으로서 학무관료군이 언급되는 가운데, 기존의 시학관 관련 통계적 분석 외에 또 하나의 구체적 사례로서 조선인 학무국장 연구가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제시기에 국한하여 조선인 관료의 정책을 살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와의 연속성을 살피는 데에도 매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작업일 것이다.
    셋째, 친일파 연구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추가할 수 있다. 이진호라는 조선인 고위 관료의 구체상을 구조적으로 규명하고 언설을 넘어서는 친일의 실체를 그려냄으로써 이 연구가 친일파를 논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단계로 구성, 진행한다.
    제1장 학무국장 이전 시대
    이진호가 정계에 등장한 한말부터 학무국장 재임 이전까지 궤적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고 그에 따른 행동과 의식을 내재적으로 살핀다. 그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고 동학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1895년 춘생문 사건에 가담하였으나 밀고하여 배신하였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1896년 유길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3차한일협약을 계기로 귀국하여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중추원 부참의로 임명되었고, 1908년 평안남도 관찰사 직에 올랐다. 즉 갑오개혁 시기부터 이미 일본을 배후로 하여 정치적 지위 상승을 도모했고, 보호국 체제하에서 관료생활이 본격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장기적 안목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이진호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들 또한 대부분 그의 행적을 살피고는 있지만, 친일 행적을 강조하거나 학무국장 임명을 설명하는 등 부분적 단편적으로 필요에 따라 서술된 경우가 많았기에 다소 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진호의 행적을 우선 시기별로 정리하면서 그의 언설, 사상 등을 살피고자 한다. 이 작업은 이진호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 배경이 될 것이며 학무국장 재임기를 이해하는 배경이 될 것이다.
    제2장 학무국장 재임기 이진호
    우선 학무국장 임명 배경에 대해 밝힌다. 최초의 조선인 학무국장 임명에 대해서는 기왕의 연구들에서도 어느 정도 다루어진 바 있으나, 일본 정계의 분위기, 재조일본인 사회 및 조선인 사회와의 관계, 조선교육계 등을 유기적으로 연동하여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또한 동시기 관찰사, 도지사들과 이진호를 비교하여 이진호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밝혀내겠다. 이진호가 친일관료였던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궤적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동시기 다수의 친일적인 조선인 관료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진호가 발탁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작업은 이진호의 교육정책과 조선교육론 뿐만 아니라 이진호를 발탁, 유임, 해임했던 조선총독부의 의중까지 포함하여 당시의 식민정책을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이진호와 활동 시기가 상당 부분 겹칠 뿐 아니라, 이진호의 학무국장 사임 후, 후임을 자처했던 대표적 조선인 고위관료 박중양을 염두에 두고 이진호의 특징을 살피고자 한다. 아울러 앞의 작업을 토대로 이진호 전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과 이진호의 학무국장 재임기 입안 추진한 정책을 비교・분석하여 조선교육정책 및 식민정책에서 그가 행한 역할을 규명하겠다.
    제3장 학무국장 퇴임 그 이후의 행적
    1929년 1월 이진호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依願免官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추정만 할 뿐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본 연구는 이진호의 사임이 그의 정책적 입장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 아래 그것의 실체와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퇴임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 부분도 밝히고 싶다. 다만 1934년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는 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평의원, 1941년 중추원부의장, 전시대책협의회의원, 조선임전보국단고문, 1943년 중추원 고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있으나 이 과정 또한 자세히 규명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일제시기 조선인 최초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냈던 이진호의 관력을 추적하면서 학무국장으로서의 의식과 행동의 의미를 살폈다. 이진호는 을미사변, 춘생문사건 등에서 일본측에 가담했고, 아관파천 직후 국사범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6년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평안남도관찰사로 복귀했다. 이때 그는 대한제국 관료였지만 친일관료로서 충성심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무단통치기 이진호는 경상북도 장관, 전라북도 장관을 지내며 데라우치 총독의 시정 방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동시에 3.1운동을 탄압한 공로로 ‘식민지형 관료’로 거듭나며 총독부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사실상 학무행정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그가 1920년대 사이토 총독 시기 조선인 국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통치’ 아래 조선인 정무총감 요구 기대를 적절히 수용하고,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로 조선내 민심이반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3.1운동 직후 조선인들을 회유한다는 것도 이유였다. 학무국장이 된 이진호에 대한 조선인 사회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이진호는 조선어를 교수용어로 하는 문제, 의무교육문제 등 조선인들의 기대에 선을 그으며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학무국장 재임기 이진호는 지속적으로 보통교육의 확충 보급, 실업교육의 강화, 사범교육 개정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경향은 사이토와 야마나시 시기 일관되는 듯 하면서도 관련 정책들은 해당 총독부의 방침에 맞추어 변화했다. 특히 이진호는 야마나시 총독 시기 간판 정책으로 부상한 ‘1면1교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진호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돌연 1929년 1월 사직하였다.
  • 영문
  • This study investigated the meaning of consciousness and behavior as the head of the academic affairs bureau while tracing the authority of Lee Jin-ho, who was the first Korean to serve as the head of the academic affairs bureau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aving participated in the Eulmi Incident(乙未事變) as a pro-Japanese, he fled to Japan right after Agwanpacheon(俄館播遷). In 1906, he was reinstated as the governor of South Pyeongan(平安南道) Province by Ito Hirobumi(伊藤博文), and he took this as an opportunity to prove his loyalty as a pro-Japanese official. In 1910, Lee served as the minister of Gyeongsangbuk-do and Jeollabuk-do, faithfully fulfilling the policy of Governor-General Terauchi(寺內) and suppressing the March 1st Movement, earning great confidence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fact, it had nothing to do with academic administration.
    The reason why he was able to become the director of the Korean bureaucracy during the period of Governor-General Saito(齋藤) in the 1920s was to properly accommodate the expectations of the Korean political affairs chief under ‘cultural rule’ and to dispel public sentiment in Joseon through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d massacre of Koreans in Japan. It was also a reason to appease the Joseon people right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When Lee became the director of academic affairs, the expectations of the Joseon community were high. However, he drew a line against the expectations of the Joseon people, such as the issue of using the Joseon language as a teaching term and the issue of compulsory education, and instead faithfully implemented the educational policy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During his tenure as Director of Academic Affairs, he continuously emphasized the expansion and distribution of general education, the reinforcement of vocational education, and the revision of teacher education. Although this tendency seems to be consistent during the Saito and Yamanashi(山梨) periods, the related policies have changed according to the polici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particular, he faithfully carried out the ‘one-village, one-school policy(1面1校政策)’ that Yamanashi valued. However, in January 1929, he suddenly resigned for an unknown reas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첫째, 이진호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으로 임명되기 전 대한제국 시기부터 관력이 시작되었고, 그의 친일관력으로서의 정체성은 특히 평안남도 관찰사 시절부터 본격화되었다.
    둘째, 친일 경력을 바탕으로 한일 병합 이후에도 그는 살아남아, 1910년대 이진호는 경상북도장관, 전라북도장관(->지사로 바뀜)을 지내게 된다. 특히 전라북도장관(지사) 시대 데라우치 총독의 산업진흥 방침을 충실히 수행하고, 동시에 3.1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총독부의 큰 신임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대한제국시기~전라북도장관(지사) 시절 이진호는 학무행정과 인연이 거의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셋째, 그런 이진호가 조선인 최초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이유와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진호가 적극적 친일을 해서,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서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여기에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아래 조선인 정무총감 기대설을 무마하고,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학살이 자행되면서 이에 대한 조선인들의 민심이반을 걱정한 조선총독부의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이유가 작동했다. 또한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에 대한 행재정 정리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가 당초 학무국장으로 낙점했던 이상재 등 명망가들은 국장 자리를 거절했고, 친일관료였지만 박중양, 한상룡 등은 조선총독부의 기본 교육방침과 맞지 않았다. 박중양은 초등교육 확장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이 강했고, 한상룡은 의무교육제도를 주장했다.
    넷째, 학무국장 이진호의 교육정책은 사이토 총독 시기와 야마나시 총독 시기에 미묘하게 변화했다. 그동안 1920년대 교육정책을 다룬 많은 연구들이 특별한 구분 없이 뭉뚱그려 ‘초등교육 확장 정책’ ‘실업교육 강화정책’ 등으로 언급되는 경향이 컸는데, 두 총독 사이에는 연속성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이 존재하며, 그 속에서 이진호라는 인물이 어떻게 대처해 갔는지를 포착할 수 있었다.
    다섯째, 야마나시 총독의 간판 정책으로 표방된 초등교육 확장정책 즉 1면1교정책을 추진하는 학무국 수장으로서 많은 정렬을 쏟았던 이진호는 그러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돌연 사직한다. 이후 중추원 참의로 복귀한 이진호는 1940년 国民総力朝鮮連盟評議員, 1941년 中枢院副議長, 朝鮮臨戦報国團顧問 등을 거쳐 1943년 귀족원 의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식민지 관료의 구체적 연구사례를 제공한다.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식민관료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는 미약했던 학무관료 분야를 규명함으로써, 교육정책, 교육제도사 중심의 연구들이 주를 이루었던 속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둘째, 해방 이후 식민교육의 잔재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인적 조건으로서 학무관료군이 언급되는 가운데, 기존의 시학관 관련 통계적 분석 외에 또 하나의 구체적 사례로서 조선인 학무국장 연구를 활용한다. 이는 일제시기에 국한하여 조선인 관료의 정책을 살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와의 연속성을 살피는 데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친일파 연구에 유의미한 관점과 논의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진호라는 조선인 고위 관료의 구체상을 구조적으로 규명하고 언설을 넘어서는 친일의 실체를 그려냄으로써 기존의 친일파 논의들의 토대위에, 서로 상호 작용하여 보다 풍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넷째, 이진호 연보의 완성도를 높여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의 활동 반경에 대한 정보까지 함께 연동하여 유추한다. 이것은 일제시기 조선인 유력자들의 구체적 활동을 좀 더 면밀히 추적하는 데에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이 연구들은 보완을 거쳐 향후 등재학술지에 투고할 것이다. 이는 일제시기 식민정책, 식민관료 연구 성과로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 색인어
  • 조선총독부, 학무국, 조선인관료, 이진호(李軫鎬), 학무국장, 학무관료, 문화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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